< 기른 정 끝에 돌아온 칼끝, 이방원의 상처는 신덕왕후 강씨의 이름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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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른 정 끝에 돌아온 칼끝, 이방원의 상처는 신덕왕후 강씨의 이름에서 시작되었다.

by 5914 2025.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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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과 신덕왕후는 애증에 관계였습니다.  친어머니보다 계모인 신덕왕후와 있었던 시간이 더 많았던 이방원은 신덕왕후에게 총애도 받았고 버림도 받았습니다.  총애에서  버림 그리고 복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출처 : 드라마 태종 이방원

1. 총명했던 어린 시절, 계모의 따뜻한 손길

조선 건국 이전, 고려 말의 혼란한 시대 속에 뛰어난 재능으로 주목받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바로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밝아 아버지 이성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며, 그 재능은 집안 안팎에서도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방원을 가장 아끼고 총애한 사람 중 하나는 그의 계모, 신덕왕후 강씨였습니다. 신덕왕후는 어린 이방원을 마치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했고, 어떤 전승에서는 그를 양자로 삼고 싶어 했을 정도였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집니다.

어린 시절 이방원에게 신덕왕후는 어머니와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2. 조선을 함께 만든 동지, 그러나 곧 갈라서다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이방원과 신덕왕후는 사실상 같은 편이었습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시작으로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우는 그 역사적인 순간들 속에서, 이방원은 정치와 군사 양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신덕왕후는 남편 이성계를 곁에서 적극 지지하며 건국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세워지고 새로운 질서가 자리를 잡자,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변하게 됩니다.

 3.정권 앞에 드러난 냉정함… 계모의 배신

신덕왕후는 자신의 친아들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고, 이에 따라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과 손을 잡고 왕권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방원은 점차 정권에서 밀려나는 신세가 됩니다.

이방원의 입장에서 이는 큰 배신이자 위협이었습니다. 자신을 총애하던 계모가 돌연 등을 돌려,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정치적 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정도전과 신덕왕후는 이방원을 권력에서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를 외직으로 돌리고, 중앙 정치에서 배제하는 것은 물론, 실제로 제거 대상 1순위로 삼았다는 설도 존재합니다.

출처 : 드라마 태종 이방원

4. 기른 정이 더 깊었기에… 더 큰 상처

이방원은 어린 시절 친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신덕왕후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정도의 배신보다 신덕왕후의 외면이 더 큰 상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른 정이 낳은 정보다 깊다 했는데, 그 정이 칼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이방원의 마음은 단순한 정치적 위기의식이 아니라, 감정과 상처, 그리고 분노가 얽힌 복합적 분노로 가득 차게 됩니다.

 5.하늘은 이방원 편이었나 – 제1차 왕자의 난

결국 1398년,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이방석과 그 형 이방번, 그리고 정도전을 포함한 신덕왕후 측 인물들을 모두 제거합니다.

그 무렵 신덕왕후는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상태였지만, 이방원은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에게도 복수의 칼날을 겨눈 그는, 신덕왕후의 흔적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출처: 연합뉴스

6. 무덤을 헐고 다리로 만들다 – 정릉의 훼손

신덕왕후의 무덤은 본래 서울 도성 안에 있었습니다. 조선 건국 당시 태조 이성계가 애정을 담아 직접 조성한 정릉(貞陵)이었지요.

하지만 태종이 된 이방원은 이 무덤을 왕비의 능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정릉은 헐리고, 석물과 석재는 모두 뜯겨 나갔으며, 그 돌들은 청계천의 광통교 다리를 고치는 데 사용됩니다.

조선 최고의 모욕, 죽은 이를 땅에 묻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 발에 밟히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닌, 철저한 상징적 복수였습니다.

출처: 위키배과 "정릉"

 

7. 복원된 정릉 – 한 맺힌 무덤의 귀환

이후 조선은 수백 년 동안 신덕왕후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정릉의 위치도 흐릿해졌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비운의 왕비’로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 고종 황제는 잊혀졌던 정릉을 다시 찾고 복원합니다. 일부 석물은 복구되었고, 신덕왕후는 마침내 조선의 정식 왕비로서 예우를 받게 됩니다.

8. 정과 권력이 갈라놓은 두 사람

이방원과 신덕왕후의 관계는 단순한 계모와 왕자의 갈등이 아니었습니다. 기른 정이 낳은 정보다 깊었던 인연, 그러나 권력 앞에서 차갑게 돌아선 현실, 그리고 죽은 뒤에도 이어진 철저한 복수.

이 모든 것은 조선 왕조 초기의 정치와 감정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왕이 된 이방원은 가장 총명한 왕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그 마음속에는 계모에게 받은 상처와 분노가 오랜 세월 지워지지 않았던 듯합니다.

정치와 감정이 충돌할 때, 인간은 어디까지 냉정해질 수 있을까요.
그 물음에 대한 가장 극적인 답이, 바로 이방원과 신덕왕후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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