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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8

6월 항쟁의 거리로 나온 넥타이 부대, 침묵에서 외침으로 1987년 6월 10일, 서울의 중심 종로 거리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조용히 몰려들고 있었습니다.그들은 화염병도, 깃발도, 구호도 없이 등장했습니다.대신 그들의 손에는 서류가방이 있었고, 목에는 단정한 넥타이가 걸려 있었습니다.누군가는 퇴근하자마자 넥타이를 매단 채 걸어 나왔고,누군가는 점심시간을 빌려 동료들과 짧은 거리 응원을 마친 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습니다.그들은 1987년 6월 항쟁의 조용하지만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바로 ‘넥타이 부대’였습니다.1. 시작은 참담함이었다 - 박종철, 그리고 분노로 번진 그날의 진실항쟁의 불씨는 1987년 1월 14일, 한 젊은이의 죽음에서 시작됐습니다.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박종철 열사는 경찰의 고문 끝에 사망했습니다.처음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2025. 6. 10.
백골단 – 곤봉을 든 청년들, 그리고 그들을 움직이게 한 자들 우연히 알게된 백골단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단어를 아는 이들은 치를 떨었고 잔인한 집단이라고 설명해주었지만 더 이상 그 단어를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단체가 무엇이길래 백골단이라는 단어 만으로도 치을 떠는지 알아보게 되었습니다.1.국가가 만든 익명의 폭력백골단은 1987년, 대한민국 경찰 조직이 내부적으로 만들어낸 사복 진압조직이었습니다.시위와 저항이 들끓던 시대, 정권은 ‘더 빠르고 더 조용하며, 확실한’ 진압을 원했습니다.정식 명칭도, 법적 근거도 없던 백골단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치안본부(현 경찰청)의 주도로 정보과·형사과·기동대 인원 중 체력이 좋고 판단이 빠른 경찰관들을 뽑아 조직했습니다.백골단의 임무는 간단했습니다.“시위대에 숨어들어, 주동자를 골라내어 때리고 끌고.. 2025. 6. 8.
“아이를 낳지 말라던 시대에서 아이를 낳아라던 시대까지 — 대한민국 인구정책 70년” 이런 슬로건들이 단지 유머로 들리는가? 사실 이는 모두 대한민국 정부가 실제로 내세운 인구정책 구호다. 생존과 성장, 절제와 절망의 세월 속에서 이 구호들은 시대를 반영했고, 또 시대를 끌고 갔습니다.우리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 극단적인 결과는 단지 오늘 하루, 한 해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지난 70여 년간의 선택과 회피가 쌓이고 얽히며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집단 자화상입니다. 그 시간들을 함께 따라가보고자 합니다.1. 출산은 곧 생존이었던 시절 (1945~1960년대)📢 “많이 낳는 것이 국력이다!”광복 직후와 6.25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사람’은 국가 재건의 유일한 자산이었다. 출산은 장려할 필요조차 없었다. 생존 본능이 곧 출산이.. 2025. 5. 30.
금모으기 운동, 감동 너머의 진실: 누가 구했고, 누가 책임졌습니까 1998년 외환위 당시 국민들이 금을 내놓아 위기를 극복한 금모으기 운동은 한국사에서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25여년이 지난 지금 단순한 감동을 넘어 누가 이 운동의 책임과 변화를 주도했는지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1 금모으기 운동의 전개와 구조 운동의 개요시작일: 1998년 1월 5일주최: 대한적십자사, 주요 은행, 방송사, 대기업(삼성, LG, 현대 등)참여 방식: 국민이 금 제품(반지, 목걸이, 금니 등)을 자발적으로 제출참여 유형: 일부는 무상 기부, 대부분은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판매 운동의 결과총 수집 금량: 약 227톤참여 인원: 약 351만 명당시 금 환산 가치: 약 28억 달러활용: 외환 확보용 매각 및 IMF 상환에 사용표면적으로 보면 국민의 자발.. 2025. 5. 26.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전태일의 외침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한 청년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문구를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열악한 작업환경과 법의 무력함에 분노했고, 무관심한 사회와 방관하는 정부에 저항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스물두 살, 한국 노동운동사의 시작을 알린 청년이었습니다.전태일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닌 수많은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의 사징으로 그래서 그를 기억하고 또 기억하기위해 글을 써보았습니다..1.인권이 없는 노동현장, 평화시장서울 청계천에 위치한 평화시장은 당시 봉제 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이름 뒤에는 지옥과도 같은 작업환경이 숨어 있었습니다.작업장은 대부분 불법 건축된 건물로, 창문 하나 없이 밀폐된 공간이었고, 환기 시설은.. 2025. 5. 25.
대한민국 투표의 역사와 부정선거 – 그 그림자와 교훈 이 글에서는 대한민국 선거의 역사적 흐름과 함께, 과거에 발생했던 대표적인 부정선거 사례들, 그 수법, 그리고 그러한 행위가 사회와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봅니다. 부정선거의 실체를 이해하고, 공정한 선거의 중요성을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1. 대한민국 선거의 시작과 발전대한민국의 첫 번째 공식 선거는 1948년 5월 10일에 치러진 제헌국회 의원 선거입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할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당시 유권자는 약 900만 명, 투표율은 95.5%에 달했습니다.이후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 지방선거 등 다양한 종류의 선거가 정기적으로 치러졌으며, 1987년 6월 항쟁 이후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면서 국민의 정치 참여는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2025. 5. 21.
지식보다는 인성이 먼저여야 했던 친일파 박마리아 박마리아는 뛰어난 재능을 이승만 정권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였고 끝내 아들 손에 죽음을 당하고 만 그래도 친일파 중에 끝이 좀 안 좋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1. 가난이 정말로 싫었던 아이 1906년 강원도 강릉에서 수많은 악행을 일삼았던 박마리아가 태어났습니다.그녀는 어린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한 목사집에 가정부로 들어가 그녀를 키웠습니다그녀는 가난한 자신이 싫어 아작같이 공부를 하였습니다. 목사는 그녀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끔 도와주었습니다.보통학교에서 만난 친일파 윤치호의 딸의 도움을 받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또 동창생의 도움으로 이화여자 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이 시절의 신 여성답게 사회운.. 2024. 12. 18.
김주열 열사의 죽음으로 4.19혁명과 함께 이승만대통령이 하야됐다 4.19 혁명은 국민이 나라의 주권자라고 제대로 항명하고 국민이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경험을 했던 역사적 사건입니다.1. 혁명의 시작은 3.15 부정선고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 부통령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정부의 노골적인 부정선거와 부정투표를 하는 것을 보고 시민들은 분노하였습니다. 당시 이승만은 자유당으로 제1대 2대 3대까지 연임으로 대통령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제4대에도 출마를 하였습니다. 이승만은 경제 후보인 민주당의 조병욱이 갑자스러운 병사로 단일 후보가 되어 대통령이 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대통령의 자유당의 후보인 이기붕이 상황이 달랐습니다. 이기붕은 지지율은 좋지 않아서 민주당에게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이승만의 나이가 86세로 재임기간.. 2024. 1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