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4월 7일 , 조선의 새로운 신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습니다.
독립신문은 최초 근대적 민간인 신문으로 어려운 한문대신 백성들도 읽기 쉬운 한글을 사용했습니다. 민간 신문으로 정부와 관리의 잘못도 비판하면서 당시의 조선 사회의 신문의 역할 자체를 바꾸기 시작한 특별히 의미 있는 신문입니다. 독립신문은 창간한 지 불과 3년 8개월 만인 1899년 12월 4일에 폐간되고 맙니다.

1. 서재필 중심으로 독립신문 창간하다.
독립신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조선의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을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 등 외국 세력의 경쟁은 더욱 심했고, 국내에서도 개혁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져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서재필은 나라를 바꾸려면 관린 몇 사람만 개혁해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 국민이 나라 안팎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정치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판단한것입니다.당시 개혁파 정부도 국민에게 새로운 제도와 개혁정책을 설명할 매체가 필요하던 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도 독립신문을 창간을 위해 운영비 명목으로 총 4,400원(약 4억 원 정도의 가치)을 지원과 발행을 허가했주었으며 우표요금 혜택 제공, 학생과 지방 관청 신문 구독 권장을 했습니다.
독립신문은 초기에는 정부의 개혁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을 계몽하려는 목적이 강했습니다. 허나 정부는 여기까지만 생각했고 서재필 정부와 관리들의 비판 또한 생각했던 것입니다.

2. 왜 어려운 한문 대신 한글을 선택했을까
독립신문의 가장 큰 특징은 한글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거의 학문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정치와 언론인들은 어려운 학문을 사용하여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평민이나 여성들은 그런 글들을 읽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독립신문이 한글로 이런 장벽을 낮추려고 한 것입니다.
1896년 창간 당시 신문은 모두 4면이었습니다. 앞의 3면은 한글로 된 독립신문이었고, 마지막 1면은 영어판인 『The Independent』였습니다.
1897년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을 각각 4면으로 분리해 발행했습니다. 또 글을 읽기 쉽게 하기 위해 띄어쓰기를 시도하였습니다.
영문판을 함께 만든 중요한 이유는 당시 조선에는 외교관과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서재필은 이들에게도 조선의 상황과 입장을 직접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독립신문은 국내 백성을 위한 신문인 동시에 외국인들에게 조선을 알리는 통로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3. 백성들은 독립신문을 실제로 읽었을까
독립신문을 이야기할 때 흔히 “평민과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독자 조사를 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모든 백성이 열렬히 읽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한글을 사용했다고 해도 당시 문맹률은 높았고 신문 유통도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독립신문이 일반 대중에게 정보를 넓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신문에는 정치 기사만 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육과 위생, 도로 문제, 물가와 상업, 국내외 사건, 생활과 관련된 정보와 광고까지 다양하게 실렸습니다. 본격적인 근대 신문광고도 독립신문에서 활발하게 나타났습니다.
또 한 사람이 신문을 읽으면 주변 사람들이 함께 듣는 방식으로 내용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독립신문을 통해 일반 사람들은 이전보다 쉽게 나라의 정책과 외국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이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이 커지는 사회적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국민이 나라의 일을 알고 자신의 의견을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점차 확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4. 처음에는 독립신문을 도왔던 고종과 정부
흥미로운 점은 독립신문이 처음부터 고종이나 정부의 반대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간 초기 정부는 독립신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정부 정책을 국민에게 설명하고 새로운 제도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됐기 때문입니다.
독립신문 역시 초기에는 정부에 상당히 협조적이었습니다. 정부 정책을 설명하고 국민 계몽에 중점을 두는 비교적 온건한 논조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신문은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잘못된 행정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에 각종 이권을 넘겨주는 정부의 정책도 문제 삼았습니다.
독립협회 역시 점차 국민의 정치 참여 확대와 의회 설립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가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지원했던 신문이 이제는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신문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5. 고종은 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경계하게 됐을까
독립협회의 활동이 커지면서 고종의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일반 시민들이 정치 문제를 공개적으로 토론하도록 했습니다.
처음에는 개혁과 계몽운동에 가까웠지만, 점차 정부 정책과 관리들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국민의 정치 참여 확대를 요구했습니다.
고종과 보수 관료들에게 이런 움직임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보수파 관료들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없애고 공화정을 만들려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민 참정 요구가 커지면서 고종 역시 독립협회의 움직임을 불안하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898년 말 독립협회는 사실상 강제로 해산됐습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완전히 같은 조직은 아니었지만 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독립협회의 해산은 독립신문에도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6. 일본은 독립신문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독립신문이 무조건 반일신문이었다고 설명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독립신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조선의 자주독립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뿐 아니라 러시아를 포함해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외국 세력을 경계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조선의 정치와 경제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기사를 실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서 자신들의 입장에 우호적인 언론 활동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일본의 간섭을 비판하는 독립신문은 일본 입장에서 항상 편안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일본의 반응을 “독립신문을 처음부터 탄압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정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독립신문은 특정 국가의 편을 들기보다는 조선이 외국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인 국가로 서야 한다는 입장을 중심으로 외세를 비판했습니다.
7. 서재필이 떠난 뒤 독립신문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부와 독립협회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서재필 역시 조선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그는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윤치호와 아펜젤러 등이 독립신문 운영에 참여했지만 신문의 상황은 점차 어려워졌습니다.
1898년 말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정치적 기반도 크게 약해졌습니다.
영문판도 점차 축소되고 휴간되는 등 신문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경영 문제도 있었습니다.
신문을 만들려면 인쇄비와 인건비가 필요했지만 당시 조선에는 안정적인 신문 구독 문화가 아직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정부와의 관계도 악화됐습니다.
1899년 7월 정부는 독립신문사가 사용하던 정부 소유의 건물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정부는 서재필에게 4,000원을 지급하고 독립신문의 판권과 인쇄시설을 인수했습니다.

8. 3년 8개월 만에 사라진 독립신문 그리고 "신문의 날"
1899년 12월 4일, 독립신문은 마지막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1896년 4월 7일 창간된 지 약 3년 8개월 만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한글판은 모두 776호, 영문판은 442호가 발행됐습니다.
발행 기간만 보면 매우 짧습니다.
하지만 독립신문이 한국 사회에 남긴 변화는 작지 않았습니다.
독립신문은 평범한 사람이 읽을 수 있는 한글신문을 만들었고,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일을 국민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정부가 하는 일도 신문이 비판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처음에는 정부의 지원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고 국민의 정치 참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했습니다.
결국 정부와 충돌하면서 사라졌다는 과정 자체가 당시 조선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독립신문의 가장 큰 의미는 어쩌면 신문 한 장보다 그 안에 담긴 생각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라의 일은 관리들만 아는 것이 아니라 국민도 알아야 하고, 국민 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날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기념하는 것도 이런 역사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