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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서자 , 얼자의 서글픈 신분 제도

by 5914 2025.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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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에 나오는 주인공은 어머니가 본처가 아닌 첩이어서 아들인 홍길동의 신분은 서얼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서자나 얼자는 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돼 법이 있었으며  본처의 자식들과의 차별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 서글픈 신분제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참고자료:벌것벗은 한국사

 1.조선시대의 서얼 규정 "서얼금고법"으로 시작

 어머니가  양인 이면" 서자"하고  어머니가 관비(기생)이거나  집안의노비인 경우는 "얼자"라고 했습니다. 이들을 통합해서 부른 것이 "서얼 "이라고 합니다       
 이런 법의 시작은 조선 초기 입니다.  고려말은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나라였습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도 두 명의 부인을 두었습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으로 넘어 오면서  일부 일처제로  바뀌게 됩니다. 조선초에는 이법으로 양반들은 많이 혼란스러워합니다.
여러 처를 둔 사람은 한 사람만 본처로 정하고 나머지는 첩으로 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 자식의 신분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태종 15년, 즉 1415년에부터  시작하고자 하였던 서얼 금고법 때문이었습니다.
이법은 서얼출신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하였고 벼슬 출세길을 막았으며 재산 상속의 제약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법전이 경국대전에  서얼 금고법이 실리면서 조선 사회에 본격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국대전은 성종 때 완성 되었으므로 그전의 서얼들은 차별은 있었으나  재능이 있으면 벼슬에도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국대전 선포로 서얼들의 차별은 법으로 정말 정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와 본처 자식들에게  가족 호칭으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항상 주인어른의 존칭으로 불러야만  했습니다.
서얼 출신이 여인들도 대부분 어머니처럼 어느 집안에 첩이 되었습니다.

 

2. 그래도 양반의 자식이었다.

서얼은 어머니가 첩이라는 이유로 본처 자식과 차별은 당한 것이지 그래도 아버지는 양반이었고 글도 배울 기본적으로 배웠습니다.
서얼들은 조정 관직에는 못 올라도 통역하는 역관  의학을 공부하는 의관 법률을 다루는 율학 회계업무를 하는 산학 등 사회에 필요한 전문 관직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관 시험은 허용을 해주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지위와 어머니 출시에 따라 승진의 한계는 있었습니다.  
서얼이라 해도 자신이 노력하고 능력이 있으면  일반 백성들보다는 먹고 사는 데는 크게 문제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조금이나마 상속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뭔지도 모른 체  차별받은 서러움의 상처는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3.  서얼 서러움을  외치다.

조선 중기로 넘어가면서 서얼 출신의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조선은 법만 일부 일처제이지 첩이라는 제도하에  여러 여인들을 부인으로 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본 부인과 그의 자식들에게  특별 특권을 부여한 것입니다.
양반들은 일반적으로  본 부인 하나와  여러 명의 첩을 두었으니 적자보다 서얼들이 더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같은 아버지를 두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 적자와 차별받는 것에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이 되었습니다.  서자에 서자 출신인 광해군에게 적자와 동등하게 과거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상소를 올리지만 광해군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서얼 7명이 모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결국  잡히게 되는데  도적질 한 자금으로 역모를 일으킬 생각이라고  자백을 합니다.   칠서의 난이 도화선이 되어  광해군의  왕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목대비를 폐위 시키고 영창대군과 그의 측근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계축옥사가 일어납니다
영조즉위 후에도   서얼 260여 명이 서얼 차별 금지를 없애 달라는 집단 상소를 올린 적도 있습니다. 
그들은  서얼의 신분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4. 그들의 서러움을 알아 봐준 사람들

조선 초기  조광조는 좁은 나라에서  여러 신분차별로 인재 등용을 못함을  중종에게 말을 하였고 율곡 이이도  임지왜란 이후  선조에게  일부 조건을 달아 서얼들도 과거응시 자격을 주게끔 하였습니다.
서얼들의 재능을 옆에서 보면서 안타까워했던 허균도 있습니다.  허균은 명문 집안에 적자의 출신이었지만 항상 서얼들을 곁에 두고 벗을 삼았고  그들의 서러움을 대변하는 한글 홍길동전도 남기었습니다.
왕인 영조도 서얼들의 서러운 마음을 알아 서얼들의 관직 제안을 막는 규정을 없애고 호부호형도  허용하였습니다. 즉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강직한 영조도 이 법을 등용을 재위한 지 40년이 넘어서야 할 수 있었습니다.
영조에 뒤를 이은 정조도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능력 있는 서얼들을 직접 등용을 하기도 했습니다.

5. 서얼 신분제도는 오래된 습관이고 누적된 폐단이었다

서얼의 대한 차별은  오래된 습관으로 영조와 정조에 노력에도 쉽게 바뀌지 못했습니다.
왕이 그들을 감싸 수록 서얼에 대한 핍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양반의 적자들은  기득권을 어떻게든 서얼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하고 순조, 현종 때도  전국적으로 서얼들이 모여  관직에 대한 차별을 폐지해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서얼의 폐지는 고종 때 갑오개혁으로 노비제도가 혁파가 되면서 서얼의 차별도 폐지됩니다.
법적으로는 폐지가 되었지만  사회적으로  그들의 차별과 서러움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잘못으로 태어날 때부터 차별을 감내해야만 했던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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