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최초 유형, 무형 유네스코에 등재 된 조선의 뿌리 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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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사건. 정치 그외

우리나라 최초 유형, 무형 유네스코에 등재 된 조선의 뿌리 죵

by 5914 2026.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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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1995년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과 같이 우리나라 최초 유네스코에 등재된  곳으로 왕의 조상을 모시는 곳입니다
또한 해마다  제를 올리는 종묘 제례악은 2001년에  무형문화재로 등재될 만큼  역사의 뿌리가 깊은 곳으로  오늘 종묘에 대해 알아볼려고 합니다.

 

1. 조선의 설계도, 그 첫 번째 획: 정도전과 종묘

역사에 조금만 관심있으신 분들은 알겠지만 한양을 설계한 사람은 정도전 입니다.  그는 경복궁과 종묘 사직을 중심으로 해서 한양에 4대문을 설계했는데.  그중 가장 먼저 세운 것이 종묘였습니다. 
정도전은 유교적 원칙인 "좌묘우사"를 염두해 둔거입니다 .
좌묘(左廟): 임금이 앉은 자리(경복궁)를 기준으로 왼쪽(동쪽)에 조상을 모시는 종묘를 둔다.
우사(右社): 오른쪽(서쪽)에는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을 둔다.
정도전을 이 설계를  통해 조선이 "효(孝)"를  근본으로 하는 나라임을  선포한것입니다.
왕실의 뿌리를 내리는 작업이 왕이 살 집을 젓는 것보다 조상을 모시는 사당을 짓는 것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전통성과  철학적 기반이 된다고 정도전은 아마도 판단을 했던 모양입니다.

2. 세계가 먼저 알아본 가치: 대한민국 제 1호 유네스코 등재 

종묘는 우리나라가 가진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유독 독보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1995년 대한민국 최초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석굴암, 불국사 , 해인사 장경판전과 함깨 이름을 올렸는데, 서양의 건축 전문가들은  종묘를 보고 "동양의 파르테논", 건축적 숭고미라고 할만큼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화려한 금칠이나 복잡한 단청 하나 없이, 오직 붉은 기둥과 반복되는 서까래, 그리고 거친 박석이 깔린 넓은 월대만으로 이 공간의 "절제와 비움의 미학"을 극단저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이 처음 건설할때는 정전의 칸이 7칸이었는데 훗날 19칸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정도전은 이것도 계산에 넣어서  공간을 넓게 설계를 하였다고 합니다.  
유네스코는 종묘의 건축뿐만 아니라 그안에서 흐르는 시간의 연속성에 주목을 하였습니다. 600년전에 음악과 의례가 현재까지  진행이 되는 것도 큰 의미를 두게 되어  "종묘제례악"을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 하였습니다.  종묘는 건물과 의식 모구가 세계적인 보물로 공인받는 영예를 안게 된 우리의 뿌리 입니다

3. 정전과 영녕전: 조선의 왕들이 계신는 곳

종묘에는 다른 처소들도  중에 왕을 모시는 곳이 정전과 영녕전이 있습니다.  다른 곳들은 제사를 준비하거나 관리등 그리고 왕이 잠시 기다는 처소등등이 있는데  정전과 영녕전은 조산을 모시는 엄숙한 곳입니다,.

정전(正殿): 영원히 잊히지 않을 왕들의 자리

국보로 지정된 정전은 주선의 "메인 스테이지"입니다 이곳에는 "불천위(不遷位)"라 불리는 왕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원래 유교 예법대로라면 4대가 지난 왕의 신주는 욞겨야 하지만 업적이 너무 뛰어나 영원히 정전에서 제사를 받기로 합의된 왕들입니다.
태조,세종.정조 등 우리가 교과서에서 만나는 왕들이 여기에 계십니다.  신주가 늘어날 때마다 옆으로 칸를 이어 붙인 덕분에 현재 총19칸, 길이 약 101m라는 세계에서 가장 긴 단일 목조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영녕전(永寧殿): 조상과 후손의 영원한 안녕

세종 대에 정전의 자리가 부족해지자 새로 지은 별묘입니다. "조상과 자손이 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정전에서 4대가 지나 자리를 옮겨온 (조천)왕들즉 태조(이성계)의 선조들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재위 기간이 짧았던 왕들이나 살았있을때 왕이 아니었지만 사후 왕으로 추대받는 분들 이곳에 모셔져 있습니다. 분위기는 정전보다 조금 아담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벼 총 16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4. 왕의 곁을 지키는 그림자: 공신당(功臣堂)의 존재

종묘에는 또 다른 신당이 있습니다.  바로 정전 마당 한쪽 아래에 길게 자리 잡은 공신당입니다. 이곳은 왕과  함께 조선을 이끌었던 최고의 신하들을 모신 곳입니다. 이것 또한 정도전의 설계 철학이 반영된 부분입니다. 정도전은 왕 한사람의 독단이 아닌 ,현명한  신하들과 함께 다스리는 "신권"중심의 유교 정치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뜻에 따라 왕을 잘 보필하여 제사를 받게된 황희, 이이, 유성룡, 이항, 이덕형등 우리가 익히 하는 명재상들의 위패가 이곳에 모셔있습니다.   왕과 신하가 죽어서도 한 공간에 머문다는 것은 조선 왕조가 가진 독특한 정치 문화입니다.

5.  신을 모시는 시간 : 왜 제사를 밤에 지냈는가?

전통적인 종묘제례는 축시(새벽 1시~3시)에  제사를 시작했습니다.
유교적 우주관에서 죽은 자의 영혼은 "음(陰)"의 존재로 해가  떠 있는 낮(陽)에는 영혼이 활동하기 어렵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소음이 잦아들고 음기가 가장 완성한 새벽 시간에 제사를 지내야만 조상의 영혼이 비로소 지상으로 내려와 후손이 준비한 음식을 마음 편히 즐기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은 제사 며칠 전부터 "재궁"에 머물며  몸을 깨끗이 씻고 마음을 정갈하게 하여 , 오로지 조상을 생각하며 이 새벽의 의례를 준비하였습니다. 조용한 새벽에 웅장한 음악이 울리며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을 것같습니다

 

6. 절대 음감  세종대왕 , 종묘제례악이라는 걸작을  낳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뿐만 아니라  조선의 음악에서조 혁명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종묘제례악은  음악의 천재인 세종대왕이 있어기에  만들수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시작을 하시고 이후 세조에 와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편경의 미세한 오차를 잡아낸 절대음감

실록에는 세종대왕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당시 음악의 대가였던 박연이 새로 만든 편경(돌 악기)을 연주 했는데, 세종대왕은 이를 듣자 마자 "저기 있는 돌 한장의 소리기 아주 미세가게 높구나 , 먹줄이 덜 깍인 것 같다"라고 지적을 했다고 합니다. 확인을 해 보니 미세하게 돌이 덜 깎여 있었습니다. 박연조차 놀라게 한  절대음감이 오늘날의 종묘제례악을 만든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포토뉴스 참고

"조상님깨는 우리 소리를"

세종대왕 이전까지는 제사 때 중국의 음악을 썼습니다. 세종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해  "살아생전 우리 가락(향악)을 들으며 즐거워하셨던 조상님들께, 돌아가셨다고 왜 중국 음악만 들려드리는가?"라는 자주적인 고민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우리만의 음악 [보태평]과[정대업]입니다.  이 곡들은 훗날 세조 때 정식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어 현재까지 600년 넘게  해마다 종묘 안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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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복판인  종로 4가에서 사람들은 바쁜 일상을 지내면서 종묘 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평소에 그 곳의 관심을 두지는 않지만 조선의 뿌리, 600년 왕조의 자부심을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정신적 뿌리"인 상징적인 종묘를  떠오을게 될 것입니다.  사극에 잘 나오는 종묘사직이라는 말 이  모든것을 애기해주는  바로 그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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