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늑약에 서명한 <을사오적>중 한 사람인 이지용(李址鎔)은 왕족 출신으로 40년 넘게 관직에 있으면서 권력을 누리기 바쁜인물 이었습니다. 왕족이라는 신분 특권이 크게 작용했으며, 그는 일본으로 부터 금전적 혜택으로 사리사욕을 행하였고 도박과 사치을 일삼았지만 집안의 몰락이 아닌 상당한 재산을 유지하였던 친일하 이지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16세의 과거 급제와 40년 넘는 관직 생활, 권력의 기반
이지용은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며 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 정도 나이에 급제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고, 개인의 영민함을 떠올릴 수 있으나, 당시 이지용이 조선 왕실의 방계 왕족 출신이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의 급제는 개인 능력뿐 아니라 왕족 신분에서 비롯된 특혜가 크게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신분적 특권 덕분에 시험 준비 환경과 관직 진출 기회에서 타인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조정 내 인맥과 후원 역시 탄탄했습니다.
이후 이지용은 무려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선의 여러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군림했습니다. 내무대신, 법부대신, 의정부참정 등 여러 고위직을 맡았을 뿐 아니라, 여러 관직을 동시에 겸직하는 ‘겹직’ 권력도 누렸습니다. 겹직은 당시에도 드문 특권이었지만, 이지용은 이를 통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권력 기반을 굳혔습니다. 그의 왕족 출신 신분과 장기간 이어진 관직 생활은 그가 조선 말기 정치무대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존재였음을 보여줍니다.

2.일본과의 친밀한 관계, ‘1만 엔’ 뇌물과 한일의정서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을 자신들의 군사 및 경제적 기반으로 만들기 위해 압박을 강화했습니다. 그 해 이지용은 내무대신으로서 일본과 밀접하게 협력하며 ‘한일의정서’ 체결을 주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일본 외무성 대표 히야시 곤스케로로부터 당시 엄청난 금액인 ‘1만 엔’의 뇌물을 받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가치로 환산해도 상당한 금액으로, 조선 내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거액입니다.
이지용은 이 대가로 일본의 요구에 맞춰 반일 여론을 억제하는 임무도 맡았습니다.
3.1905년 을사늑약 서명과 친일 행위의 결정체
1905년,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강압적으로 체결시킵니다. 조약에 서명한 다섯 고위 인사 중 하나가 바로 이지용입니다.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그 대가로 이지용은 일본으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과 함께 ‘백작’이라는 귀족 작위를 받았습니다. 돈뿐 아니라 명예와 지위까지 손에 넣으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셈입니다.

4.도박과 사치, 그리고 끝내 망하지 않은 권력자
이지용은 그가 받은 돈과 특권으로 도박에 빠져들었습니다. 서울과 인천, 일본까지 왕래하며 도박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반인이라면 도박으로 인해 파산할 수도 있지만, 이지용은 도박으로 일부 재산을 탕진했음에도 결국 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왕족 출신이고, 일본 제국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부와 권력은 일시적 사치와 도박에도 끄떡없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상당한 재산이 국가에 귀속될 만큼 그의 자산은 엄청났습니다. 이는 그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이 단순한 뇌물 수준을 넘어, 지속적인 경제적 지원과 특권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5.친일파 후손에 대한 궁금증과 현재
이지용과 같은 대표적인 친일파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관심과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친일파가 받은 재산과 권력이 세습되었는지, 혹은 그들이 그 재산을 유지하며 사회적 특권을 누렸는지에 관한 질문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지용 가문의 경우,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도 상당한 재산이 남아 있었으며, 이는 일부가 국가에 귀속되긴 했지만 완전한 정산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후손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공개가 제한적인 경우가 많아 명확한 평가가 어렵지만, 역사적 책임과 사회적 윤리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높습니다.
6.‘매국노의 원조’라는 평가, 과연 적절한가?
이지용을 ‘매국노의 원조’라 부르는 평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고 봐야 합니다. 왕족 출신으로 40년 넘게 관직에 있으면서 조선의 독립과 국권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음에도, 그는 일본의 요구에 부응하며 나라를 팔고 권력과 재산을 챙겼습니다.
그의 친일 행위는 단순히 개인의 이익을 넘어, 조선의 주권 상실과 민중의 고통에 직접적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지 않고 도박과 사치로 일관하며 살아남았다는 점은 사회적 불공정과 역사적 아픔을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이지용은 단순한 친일 관료가 아니라, 왕족 출신이라는 특권과 오랜 권력 기반을 바탕으로 조선 말기 국권을 일본에 넘긴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능력 때문이 아니라 신분 덕분이었다는 점, 일본으로부터 받은 거액의 뇌물과 특권, 도박과 사치로 재산을 탕진했음에도 몰락하지 않았던 점, 그리고 후손들에 대한 의문까지, 이 모든 사실이 오늘날 우리가 그의 삶을 평가할 때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나라를 팔아 사리사욕을 취한 그의 역사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며, 역사적 책임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이유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