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이지만 일반적으로 강화도 조약으로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이 조약은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 국제법 토대로 일본과 체결한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시작한 첫걸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강화도 조약을 하게된 배경과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당시 조선과 일본은 ~
쇄국정책을 강행하였던 흥성대원군은 고종이 어린다는 이유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으나 어느새 고종도 성인이 되어 직접 다스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지 않자 고종은 반 강제적으로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을 개방하여야 한다는 개화파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고종도 개화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세계적으로 스스로 고립하였기 때문에 판세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여러나라와 개화하여 조선이 고립이 되어 있는 동안 많은 문물들을 받아들여 조선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본은 많은 발전으로 경제와 군사적으로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2. 일본은 일부러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다.
조선에 있어서 일본이라는 나라는 조선보다 못한 나라로 인식이 깊게 심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식이지 현실에서는 그때 일본은 개방을 하여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조선만 인식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과 외교를 하기 위해 외교문서를 보냈는데 문서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조선에서 외교를 거부하게 됩니다. 외교 문서 안에 일본의 왕을 천황, 고종을 왕이라고 지명한 것입니다.
즉 일본의 왕보다 우리 조선의 왕이 더 아래에 놓인 것입니다. 조선을 우습게 보다고 생각하여 조정에서는 크게 화를 냈으며 일본과의 외교를 거부하게 됩니다. 조선의 외교거부로 인해 일본 내에서는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일본은 우리와 교역을 하고자 미국이 일본을 개방하였을 때와 같은 방법을 이용을 합니다.
1875년 일본의 운요호는 강화도 앞바다까지 접근하였습니다. 운요호는 일본이 영국에서 수입한 근대식 군함이었습니다. 최신식 군함을 몰고 와 강화도에서 치열한 포격적을 버렸습니다. 조선은 맹렬히 일본군을 막아 냈고 운요호는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일본 군함은 다시 조선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이 지나가고 있는 운요호 군함을 먼저 조선이 공격을 하였다면서 억지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여러 군함이 몰려와 조선을 압박을 하고 있으니 그들의 요구를 살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을 운요호 사건 핑계로 조선을 개방하라는 것입니다. 개방을 안 하면 강화도 일대를 초토화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종은 이때 세계에 대해 관심을 많이 보였고 일본이 강제로 개방하라는 것은 마음에 안 들었으나 그래도 이번 기회에 개화의 문을 열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조건을 들어주기로 하였지만 조선은 개방하기 위해 아무 준비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3.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다
1876년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 즉 강화도 조약을 일본의 강요로 조정대신들과 체결하는데 주 내용은 조선과 일본이 서로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맺는 통상조약입니다
강화도 조약안에는 어떤 불평등한 내용을 살펴보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조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
글이 내용은 근사하지만 일본은 자주국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당시 청나라였던 중국과 조선을 분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쓴 문구입니다.
제4조 부산 외에 두 곳(인천, 개항)을 개항하고 일본인의 왕래 통상함을 허가한다
일본은 부산, 인천. 원산 지명을 콕 집어서 요구한 것은 부산은 무역을 하기가 편했으며 인천과 원산을 개항하면 빠른속도로 한양을 침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9조 양국 백성들은 자유롭게 거래하며, 양국 관리들은 간섭하거나 금지할 수 없다
제10조 일본 백성이 조선에서 죄를 범했을 경우 일본 관리가 심판하도록 한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범죄를 저질러도 조선이 그들을 심판할 수 없는 것
이런 조항 말고도 일본인에게 무관세로 할 것 그리고 조선의 곡물을 제한 없이 살 수 있다는 조항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심각한 쌀 부족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조선이 곡식이 넉넉한 시기도 아니었습니다.
이 조약 이후 일본이 쌀을 많이 가져가는 바람에 조선의 쌀 값은 급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인은 조선의 땅에서 물건을 사고팔면서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불평등 조약을 조정에서는 왜 하였는지 의문도 생기긴 하지만 당시 조정 대신들은 조약체결의 의미를 아예 몰랐습니다. 즉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파악이 안 되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갔고 온 문서의 내용의 의미도 모르는 채 어쩔 수 없이 조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이 강화도 불평등 조약으로 이때까지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마음보다 조선을 빨리 발전시켜 조선과 연합하여 강국인 러시아를 경계하고 싶은게 마음이 더 컸습니다.그리고 일본인들은 조선을 개화시키려고 노력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대신들은 유교사상에 묻혀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보면서도 그것들의 의미를 몰랐으며 일본인들을 이용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유교만이 절대적으로 믿었던 조정대신들이 처음으로 격은 조약을 몰라 이런 불평등 조약을 할 수 있다고는 봅니다. 그러나 일본과 교역을 하면서 조선보다 못한 일본이 점점 강국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고종과 조정의 대신들은 무엇을 했고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조선의 앞날을 아는 나는 답답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