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친일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악랄함은 현세에서도 치를 떨게끔 합니다. 그러나 그 악랄한 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해방 이후 그들이 제대로 처벌을 받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 친일파 중 하나인 고문귀, 착혈고문으로 유명한 한판락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1. 하판락은 오로지 출세
하판락은 1912년 경남 진주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편안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일제 강점 시대로 일제 치하안에서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4년에 일제경찰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학생시절에는 반일적인 성향으로 학생항일운동에 참석했다가 구류처분을 받은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된 후에는 하판락은 오로지 출세였습니다.
일본 경잘이 된 지 3년 후 부산과 사천에서 근무하면서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는 데 열을 올렸습니다.
그 성과로 경상남도 고등경찰과로 자리를 옮겨 조선인에도 불구하고 순사부장과 경부보등의 승승장구를 하였습니다.
2. 동족을 고문하는 하판란
하판란이 고문귀신으로 유명해진 사건은 1930년 말 부산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을 하판락이 수십 명을 잡아와 집단고문을 하였습니다. 하판란은 자신도 조선인데도 불구하고 고문장 안에서 조센징이라고 비하하면서 그들을 잔혹하게 고문 가하였습니다. 같은 동족으로서 할 수 없는 비극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1943년 "친우회 전단사건"으로 일본 주요 군사품을 생산하는 부산공장에 주요 시설에 불을 지를 계획을 하고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 대한 독립 만세"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뿌리는 항일 운동을 한 비밀 결사대 친우회는 결국 한판란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하판란은 친우회와 울산에서 체포된 사회주의 연맹과 연결시켜 사건의 규모를 더 키우려고 하였습니다. 일본경찰과 하판란은 거짓 증언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의 강도를 더 심하게 하였습니다. 천우회의 총책인 이광우의 증언에 의하면 하판란의 고문받는 모든 사람을 모아 놓고 알몸인체 구타, 전기고문, 물고문, 압슬고문등을 받는 모습을 보게 하였습니다. 동료가 고통으로 몸서리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고문당하는 순서를 기다려야만 하였습니다.
그중 착혈고문이라는 것이 있는데 고문당하는 사람 몸에 주사기를 여기저기 찔러 피를 뽑아 그 피를 다시 그 사람의 얼굴이나 몸에 뿌리는 고문을 반복적으로 하였습니다. 당하는 사람은 수취심과 공포가 몰려오게 하는 정신적 파괴 고문이었습니다.
이광우도 심한 고문으로 다리 근육이 파열되어 평생을 고생을 하였습니다. 하판락의 심한 고문으로 사람들은 죽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으로 살아야만 하였습니다.

3. 해방 이후 하판락은?
드디어 1945년 8월에 대한제국은 일본으로 부터 해방을 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도 하판락은 미군정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으로 경찰로 다시 근무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인 적산 재산 처리에 관한 업무 처리를 하면서 더 많은 부를 추적하게 되었습니다.
1949년 나라에서 친일파들을 처단 하기위해 반민특위를 만들어 친일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부산에 살고 있던 하판락도 잡혀 서울로 압송하게 되었습니다. 일화에 의하면 하판란이 서울로 압송하는 날 부산 시민들이 몰려와 부산에서 직접 심판할 수 있게 해 달라면서 길을 막았다고 합니다. 하판락에게 당한 부산 시민들은 직접 그를 처벌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판락은 반민특위 재판에서 자신이 고문한 사실들을 끝끝내 부인을 하였습니다. 1949년 6월 친일 경찰들의 습격으로 반민특위가 해채되면서 한판란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석방되고 말았습니다.
하판락은 석방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지방선거에 출마를 하였으나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축적한 돈으로 금융업을 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벌어 들렸고 신분세탁을 하기 위해 지역에 많은 기부들을 하면서 그가 지난날 한 행위들은 과거 속으로 묻히고 있었습니다.

4. 독립투사 이광우의 아들 노력
하판락이 악동한 고문귀신에서 지역발전을 위해 힘쓰는 지역 유지로 신분세탁하는 동안 그에게 고문을 당한
이광우는 고문당한 기록과 제판기록등이 다 소멸되어 독립유공자 인정도 받지 못하고 평생을 아픈 몸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광우의 아들은 아버지의 인생 염원을 위해 독립운동으로 고문을 받은 증거와 재판기록등을 찾으러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찾아다녀봐도 아버지의 기록들은 남아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인터넷이 보급이 되면서 한판락이라는 이름을 검색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검색이 되었고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아버지를 고문한 하판락이 맞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광우의 아들은 취재진들과 함께 하판락을 직접 찾아가 그의 증언을 받아 오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찾아가는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를 만나면 그냥 죽여버러라 그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찾아간 하판락은 나이가 90세인데도 불구하고 건강하였으며 어마 어마하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하판락은 이광우가 누구인지도 몰랐으나 아들이 그이 심복인 김소복의 이름을 애기하자 하판락은 내 심복의 이름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잡혀온 것이 맞으며 심복이 고문한 것이지 직접적으로 고문한 적이 없다면서 뻔뻔함을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방송이 되면서 사람들은 그의 실체를 알고는 분노하였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영혼 없는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의 증언으로 이광우는 2000년에 와서야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후 하판란은 어쩌다가 천수를 다 누리고 사망하였습니다.
독립유공자인 이광우는 "직접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했던 건 고문당하는 이들을 지켜보는 일" 이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