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2달러의 주인공인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의 3대 대통령으로 독립선언문 초안 작성,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미국의 영토를 두배 가까이 넓인 인물입니다. 그는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인물이지만 노예를 600여명을 소유하고 했고 또한 노예와의 자신을 두었다는 소문도 있는 인물입니다. 미국 이상을 설계한 위대한 대통령이지만 그의 사생활은 그의 주장과 모순된 부분이 많아 사람들의 평가들이 많이 갈리는 인물로 그런 토마스제페슨의 삶과 업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학문을 사랑한 지식인, 독립선언서를 쓰다
토머스 제퍼슨은 1743년 버지니아 앨버말 카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피터 제퍼슨은 농장주이자 측량사였고, 어머니 제인 랜돌프는 버지니아의 유력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제퍼슨은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고, 역사와 철학, 수학, 자연과학, 음악, 건축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바이올린을 즐겨 연주했으며, 평생 수많은 책을 수집한 독서가이기도 했습니다.
1760년 윌리엄앤드메리대학에 입학한 그는 철학과 수학, 과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유명한 법률가 조지 와이스에게 법률을 배우고 1767년 변호사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법정 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식민지 주민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고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제퍼슨은 정부의 권력은 국민의 동의에서 나와야 하며, 정부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독립전쟁이 시작된 뒤 대륙회의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문서를 작성하기로 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과 존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 등 다섯 명이 작성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초안은 뛰어난 문장가였던 제퍼슨이 맡았습니다.
제퍼슨은 독립선언서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썼습니다. 인간에게는 생명과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정부가 그 권리를 파괴한다면 국민은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문장은 단순히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이유만을 설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노예제 폐지운동과 여성 참정권 운동,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도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선언된 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여성에게는 정치적 권리가 없었고, 원주민은 새로운 국가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흑인 노예제 역시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는 미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출발점이었지만, 미국 사회가 오랫동안 지키지 못한 약속이기도 했습니다.
2. 해밀턴과 충돌하며 미국의 미래를 고민하다
독립전쟁이 끝난 뒤 제퍼슨은 조지 워싱턴 행정부의 초대 국무장관이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과 미국의 미래를 놓고 끊임없이 충돌했습니다.
제퍼슨은 중앙정부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지면 국민의 자유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각 주의 자치권을 보장하고, 토지를 소유한 독립적인 농민들이 국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꿈꾼 미국은 농업을 기반으로 시민들이 자립하며 살아가는 공화국이었습니다.
반면 해밀턴은 미국이 유럽 강대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정부와 금융제도, 제조업,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연방정부가 독립전쟁 중 발생한 각 주의 부채를 떠안고, 국립은행을 설립해 국가의 신용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제퍼슨은 국립은행 설립이 헌법에 명확히 적혀 있지 않은 권한이라며 반대했습니다. 반면 해밀턴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일이라면 헌법에 직접 규정되지 않았더라도 연방정부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두 사람의 대립은 단순한 개인적 경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이 농업국가가 될 것인지 산업국가가 될 것인지, 주 정부의 권한을 중시할 것인지 강력한 중앙정부를 만들 것인지를 둘러싼 국가적 논쟁이었습니다.
결국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을 중심으로 민주공화당이 형성되었고, 해밀턴을 중심으로 연방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미국 최초의 정당 정치로 이어졌습니다.
제퍼슨은 1793년 국무장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몬티첼로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정치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방당 정부의 권력 확대와 언론 통제 정책에 맞서는 야당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3. 미국 제3대 대통령이 되다
제퍼슨은 1796년 대통령선거에서 존 애덤스에게 패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선거제도에 따라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은 제퍼슨이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은 연방당의 존 애덤스였고 부통령은 민주공화당의 제퍼슨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같은 행정부에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 대립했습니다.
1800년 대통령선거에서 제퍼슨은 다시 존 애덤스와 맞붙었습니다. 선거 결과 제퍼슨과 같은 당 후보였던 애런 버의 선거인단 득표수가 같아지면서 대통령 결정은 하원으로 넘어갔습니다.
여러 차례 투표 끝에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801년 미국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이 선거는 미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집권당인 연방당이 선거에서 패배한 뒤 야당인 민주공화당에 평화적으로 정권을 넘겼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대립이 매우 심했지만 군사쿠데타나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헌법과 선거 절차에 따라 권력이 교체되면서 미국 민주주의는 중요한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제퍼슨은 취임 연설에서 정당이 다르더라도 모두 같은 미국인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정권은 바뀌어도 국가와 헌법의 질서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4. 루이지애나 매입과 바르바리 전쟁
제퍼슨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되는 사건은 1803년의 루이지애나 매입입니다.
당시 미국 서부 농민들에게 미시시피강과 뉴올리언스 항구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농산물을 배에 실어 해외로 수출하려면 이 지역을 반드시 이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스페인으로부터 루이지애나 지역을 넘겨받자 미국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제퍼슨은 프랑스에 대표단을 보내 뉴올리언스와 주변 지역을 사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예상보다 훨씬 넓은 루이지애나 전체를 1,500만 달러에 팔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유럽 전쟁에 필요한 자금이 필요했고, 북미 식민지 운영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제퍼슨에게는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는 평소 대통령과 중앙정부가 헌법에 정해진 권한만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헌법에는 대통령이 외국으로부터 거대한 영토를 매입할 수 있다는 내용이 명확하게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루이지애나 매입을 결정했습니다.
미국은 약 214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영토를 얻었고, 국토는 두 배 가까이 넓어졌습니다. 미국은 대서양 연안의 국가에서 북미 대륙 내부로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루이지애나 매입은 제퍼슨의 과감한 결단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정치적 모순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는 엄격한 헌법 해석을 주장했지만 국가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넓게 사용했습니다.
새로운 영토의 확보는 또 다른 문제도 만들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기기 시작했고, 노예제를 서부 지역까지 확대할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도 커졌습니다.
제퍼슨은 군사력 사용에서도 자신의 원칙과 다른 선택을 내렸습니다.
그는 작은 정부와 군사력 축소를 주장했지만,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국가들이 미국 상선을 공격하고 더 많은 공물을 요구하자 해군을 지중해에 파견했습니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이 북아프리카의 해적 세력을 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미국은 더 이상 일방적으로 공물을 바치는 약소국으로 남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작은 정부를 주장했던 제퍼슨도 국가의 주권과 국민의 재산이 위협받자 군사력을 사용한 것입니다.

5. 언론의 자유와 실패한 금수조치
제퍼슨은 언론의 자유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자유로운 언론이 정부를 감시해야 하며, 국민이 대통령과 정부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존 애덤스 정부가 선동법을 이용해 정부 비판 언론인을 처벌하자 제퍼슨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선동법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사면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언론의 비판을 언제나 너그럽게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자신과 샐리 헤밍스의 관계를 보도한 언론인과 갈등을 빚었고, 거짓 보도를 하는 언론인을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제퍼슨은 언론의 자유를 중요한 원칙으로 인정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거친 비판과 허위 보도에 큰 불만을 느꼈습니다.
그의 의미는 언론 비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언론이 존재하더라도 대통령이 국가권력을 이용해 언론 전체를 탄압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남겼다는 데 있습니다.
제퍼슨의 재임기가 성공으로만 채워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미국의 선박을 나포하거나 해상무역을 방해했습니다. 특히 영국 해군은 미국 선박을 수색해 선원들을 강제로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제퍼슨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직접 전쟁을 벌이는 대신 경제제재를 선택했습니다. 1807년 미국 선박의 해외무역을 금지하는 금수법을 시행한 것입니다.
그는 미국의 농산물과 원자재를 공급받지 못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에 가까웠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보다 미국의 상인과 농민들이 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항구도시의 경제가 침체했고, 농산물 수출이 막히면서 농민들의 불만도 커졌습니다. 밀수가 증가했고, 특히 무역 의존도가 높았던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제퍼슨 정부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습니다.
작은 정부와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던 제퍼슨 정부가 금수조치를 시행하기 위해 국민의 무역을 강하게 통제했다는 점에서도 모순이 드러났습니다.
6. 자유를 선언했지만 노예를 소유했던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을 평가할 때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는 노예제입니다.
그는 독립선언서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썼고, 노예제가 미국 사회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퍼슨은 평생 600명이 넘는 노예를 소유했습니다. 그의 농장과 저택, 생활과 연구는 노예들의 노동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그는 노예제의 문제를 인정하면서도 이를 즉시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예를 점진적으로 해방한 뒤 미국 밖으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같은 사회에서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도 한계를 보였습니다.
특히 몬티첼로에서 노예로 살았던 샐리 헤밍스와의 관계는 제퍼슨의 삶에 가장 큰 논란을 남겼습니다.
오늘날에는 문헌자료와 구전 기록, DNA 연구 등을 통해 제퍼슨이 샐리 헤밍스 자녀들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다만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한 사랑이나 연애로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샐리 헤밍스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지 못한 노예였고, 제퍼슨은 그녀의 소유주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권력과 신분의 극심한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제퍼슨은 자유를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했지만, 자신의 농장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그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단순히 시대적 한계로만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같은 시대에도 노예제에 반대하거나 자신이 소유한 노예를 해방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80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제퍼슨은 고향 몬티첼로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그는 교육에 힘을 쏟았고, 버지니아대학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대학이 특정 종교나 권력에 종속되지 않고, 학생들이 과학과 철학, 법학, 언어 등을 자유롭게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 건물의 설계와 교육과정에도 직접 참여했습니다.
제퍼슨은 1826년 7월 4일, 미국 독립선언 50주년 기념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놀랍게도 같은 날 오랜 정치적 경쟁자이자 친구였던 존 애덤스도 사망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에 새길 문구를 직접 정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업적은 미국 제3대 대통령이나 부통령, 국무장관이 아니었습니다.
- 미국 독립선언서의 작성자
-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제정자
- 버지니아대학교의 아버지
제퍼슨은 자신이 어떤 권력을 가졌는가보다 어떤 사상과 제도를 남겼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제3대 대통령이자 미국 민주주의의 설계자로 자유와 평등을 주장을 했지만 노예와 여성은 속하지 않았나 봅니다. 애덤 제임스와 달리 노예를 소유했고, 작은 정부를 주장하면서도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였고. 경제적 자유를 강조 하면서도 국민의 무역을 제한했습니다.
그의 모순된 행보는 현실과 그의 이상의 괴리감은 어쩔수 없음을 보여주는건 아닐까라고 생각이 듭니다.
'세계사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기보다 정의를 택한 법률가, 미국 제 2대 대통령 존 애덤스 (0) | 2026.07.03 |
|---|---|
| 미국의 제 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건국이 상징이 된 영웅 알아보기 (1) | 2026.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