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원 참사, 끝나지 않은 재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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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말아야 할 사건

이태원 참사, 끝나지 않은 재난의 시간

by 5914 2025.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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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여름, 또 한 번의 비보가 들려왔습니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 출동했던 두 명의 소방관이 스스로 생을 쓸쓸히 마감한 사건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30대의 젊은 대원으로, 미안하다는 메모만 남기고 실종 열흘 만에 인근 고속도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또 다른 40대 소방관은 이태원 참사 트라우마로 인해 오랜 기간 치료를 받았지만,
업무상 상관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2022년 10월 29일  10시 15분경에 일어난 이태원 압사 사건이 얼마가 끔직한 현장이었음을  

그들의 죽음으로  다시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는 아직 끝나지 못하고 고통과 아픔이 지금 이시간에도 진행중이라는 것을 159명이 목숨을 잃은 그날 밤 이후,
한국 사회는 여전히 ‘책임’이라는 단어 앞에서 멈춰 서 있습니다.


1️⃣ 예견된 재난 — 이미 들려왔던 비명

2022년 10월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해밀톤호텔 옆 골목에서 159명의 젊은 목숨이 사라졌습니다.
그날의 이태원은 축제가 아니라 방치된 혼잡의 현장이었습니다.

사고 발생 4시간 전부터, 이미 112 신고가 연이어 접수되고 있었습니다.
“압사당할 것 같다”, “사람이 깔렸다”, “통제 좀 해달라.”
이 구체적인 신고가 총 11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대부분을 ‘긴급하지 않음’으로 분류했고,
현장 순찰만 한 채 별다른 조치 없이 돌아갔습니다.

게다가 서울경찰청 정보라인은 이미
“1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며 안전사고가 우려된다”는 보고서를 올려두고 있었습니다.
위험은 충분히 예견되었지만,
누구도 신고자들의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 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날의 참사는 갑작스러운 재난이 아니라,
보지 않기로 선택한 결과였습니다.

이태원 참사 현장 사진

 

2️⃣ 현장에는 통제도, 지휘도 없었다

참사 당일 현장에는 약 130명의 경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마약 단속과 성범죄 예방을 담당했습니다.
군중 통제 인력은 없었습니다.

반면, 2018년과 2019년 이태원거리에 핼러윈 기간에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음에도 사고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기동대가 배치되고,
교통이 통제되고,
경찰이 골목 입구마다 서서 사람들의 흐름을 유도했습니다.

2022년엔 그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주최자 없는 행사’라는 이유로
국가는 스스로의 책임에서 손을 뗐습니다.

결국, 그날 밤 이태원 골목은
아무도 지휘하지 않는 전장
이었습니다.

구분 2019년 2022년

구청장 성장현 (더불어민주당) 박희영 (국민의힘)
경찰서장 송호윤 이임재
협업 구조 구청–경찰–소방 합동 회의 및 현장 대응 회의 없음, 각 기관 개별 대응
인파 대응 교통 통제·기동대 200명·안전요원 배치 통제 전무, 마약 단속 위주
결과 질서 유지, 인명 피해 無 압사 159명 사망

3️⃣ 구청의 방심, 경찰의 부재

당시 용산구청장이었던 박희영 씨는 사후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주최자 없는 행사라 구청이 개입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2019년, 같은 거리에서 핼러윈 축제가 열렸을 때
용산구청과 경찰, 소방서는 함께 ‘이태원 안전관리 대책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때 구청장이던 성장현, 경찰서장이던 송호윤
불법 노점 단속, 교통 통제, 안전요원 배치를 공동으로 진행했습니다.

주최자가 없어도, 공공의 책임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2022년, 같은 상황에서
박희영 구청장과 이임재 용산경찰서장은
어떤 회의도, 어떤 협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침묵 속에서 수백 명의 청년이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쓰러졌습니다.

이태원 참사 기자회견

 

4️⃣ 현장의 최고 책임자 — 이임재 용산경찰서장

그날 현장의 최고 책임자는 이임재 용산경찰서장이었습니다.
그는 오후 9시 이후부터 계속되는 위험 보고를 받았지만,
현장에 도착한 건 참사 발생 50분이 지난 11시경이었습니다.

그는 도착하고도 현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지휘 체계는 무너졌습니다.
결국 2024년 9월, 법원은 그에게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했습니다.

“피고인은 인파 밀집의 위험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음에도
사전 대비나 경고 조치를 하지 않았다.
사고 발생 후에도 즉시 구조를 지휘하지 않았다.”

이임재는 이태원 참사 관련 공직자 중 유일하게 실형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윗선, 서울경찰청장 김광호, 용산구청장 박희영은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법원은 “법적 주의의무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즉, 지휘체계의 최상단은 책임에서 벗어났습니다.

 

5️⃣ 은폐 시도 — ‘위험 보고서’ 삭제 사건

참사 직후, 경찰 내부에서는
‘사전 위험 분석 보고서’를 삭제하라는 지시가 내려갔습니다.
서울청 정보부장 박성민은 부하 직원에게
“상부 보고 기록을 지워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보고서에는
“핼러윈 기간 약 10만 명 이상의 인파 예상, 압사 위험 존재”라는 문구가 있었고,
이는 실제로 상부(김광호 청장)에게 보고된 사실이었습니다.

법원은 그에게 증거인멸 교사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는 참사 관련 공직자 중 가장 먼저 실형을 선고받은 인물입니다.
국가가 스스로 눈을 가린 사건, 그것이 이태원 이후 대한민국의 또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6️⃣ 3년이 지나서야 만들어진 진상조사위원회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3년이 지난 2025년 5월,
국회는 뒤늦게 ‘10·29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를 출범시켰습니다.

특조위는 지금
“왜 그날, 아무도 기동대를 보내지 않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또한 “대통령실 이전으로 경찰 인력이 축소된 것은 아닌가”,
“‘주최자 없는 행사’라는 논리가 책임 회피의 도구가 된 건 아닌가”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3년이 걸렸습니다.
그 시간 동안 유가족들은 거리에 서 있었고,
생존자들은 불면과 공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뎠습니다.
국가는 너무 늦게 움직였고,
그 사이 사람들의 믿음은 무너졌습니다.

7️⃣ MZ세대가 느낀 건, 슬픔이 아니라 ‘배신감’

이태원 참사 희생자 중 다수는 20대였습니다.
대학생, 신입사원, 사회 초년생.
그들은 “국가가 나를 지켜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던 세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 믿음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국가가 없었다”는 말을 그들은 직접 경험했습니다.

MZ세대는 2022년 이태원에서
안전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허망한 약속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들에게 국가는, 재난을 관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재난이 닥치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존재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그 감정은 분노보다 깊은 배신감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믿었어요.
그런데 그 믿음의 대가가 죽음이었어요.”

🕯 마무리하며

이태원 참사는 대한민국 땅에서 일어나서는 안돼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코로나 해제 이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상황 파악이  안돼어서  어쩔수 없는 비극이라고 애기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닙니다.이전에는  이태원 거리는 통제를 했고 비슷한 인파가 몰려음에도 아무 사고도 없었습니다. .  이 뿐만 아니라 여러 행사때마다   많은 인파들이  몰리는 곳에서도 경칠에 인솔에  잘 따르는 국민들입니다. 이날  2022년 10월 29일 경찰에 통제의  명령만 있었으며  156명은 지금  이시간에 가족, 친구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갑니다.  왜 통제를 못했는지~   이제라도 변명이 아닌 사실이 밝혀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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