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자유를 주장한 대통령 이면 - 토머스 제퍼슨과 흑인 노예 샐리 헤밍스,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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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사건. 정치 그외

인간의 자유를 주장한 대통령 이면 - 토머스 제퍼슨과 흑인 노예 샐리 헤밍스, 스캔들

by 5914 2026.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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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이 문구는 미국의 독립선언서의 문장으로  건국의 아버지이자 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이 남긴 문장입니다.  그는 미국의 독립과 자유국가를 만드는데 많은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권과 자유는 백인들에게만 속한 것이었나 봅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인권과 자유를 주장했지만  사적으로는  600명의 흑인 노예를 두었고 심지어 그는 아내와 사별한 후 그와 30살 이상 차이가 있는 10대인 흑인 노예 샐리 헤밍스와 30년 넘는 관계를 맺고 6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당시 제퍼슨의 침묵으로 진실은 의혹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후 200년 후 과학의 힘으로   샐리 헤밍스의 후손에게서 토머슨 제퍼슨 후손들과 일치는 DNA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저는 이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합니다.

 

1. 몬티첼로의 노예 소녀, 샐리 헤밍스

샐리 헤밍스는 1773년경 버지니아에서 노예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혼혈 노예 베티 헤밍스였고, 샐리는 어린 시절부터 제퍼슨의 대농장 몬티첼로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녀는 제퍼슨의 딸들과 비슷한 나이여서 딸들을 돌보는 역할을 했다고 추정이되며 또 1784년 제퍼슨은 프랑스 주재 미국 공사로 파리에 갔게 되어  1787년 미국에 있던 어린 딸을 데려오기 파리로 불러오게 됩니다. 그때 샐리 헤밍스도 같이 동행을 했습니다. 당시 샐리 헤밍스는 프랑스에서  버지니아와 전혀 다른 환경을 경험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미국 남부처럼 노예 신분이 그대로 인정되지 않았고, 법적 절차를 통해 자유를 요구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40대 중반의 제퍼슨과 10대 중반의 샐리 사이에 관계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훗날 샐리의 아들 매디슨 헤밍스는 1789년 제퍼슨이 미국으로 돌아가려 할 당시 샐리가 임신한 상태였다고 증언했습니다. 또한 샐리는 앞으로 태어날 자녀들을 성인이 되면 자유롭게 해준다는 약속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밝혔습니다.

2. 몬티첼로에서 태어난 아이들

버지니아로 돌아온 샐리는 다시 법적으로 제퍼슨의 소유가 됐습니다.
기록상 샐리는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고, 이 가운데 비벌리·해리엇·매디슨·이스턴 헤밍스 네 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후대 연구자들은 샐리의 임신 가능 시기와 제퍼슨의 이동 기록을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샐리가 임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마다 제퍼슨이 몬티첼로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자녀들의 해방 문제입니다.
제퍼슨은 평생 수백 명의 노예를 소유했지만 자유를 준 사람은 극히 적었습니다. 그러나 샐리의 살아남은 네 자녀는 모두 결국 자유를 얻었습니다.
비벌리와 해리엇은 몬티첼로를 떠났고 제퍼슨은 이들을 다시 붙잡지 않았습니다. 매디슨과 이스턴은 제퍼슨의 유언에 따라 공식적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반면 샐리 자신은 제퍼슨의 유언으로 해방되지 않았습니다. 제퍼슨이 1826년 사망한 뒤 그의 딸 마사 랜돌프가 샐리가 사실상 자유롭게 살도록 허용했습니다.

3. 1802년, 현직 대통령의 비밀이 폭로되다

제퍼슨과 샐리의 관계는 제퍼슨이 죽은 뒤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당시에도 두 사람의 관계를 둘러싼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1802년 9월, 언론인 제임스 캘렌더가 리치먼드 신문을 통해 현직 대통령 제퍼슨이 자신의 노예 여성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녀까지 두고 있다고 폭로했습니다.
그가 지목한 여성이 바로 샐리였습니다.
기사는 제퍼슨을 반대하던 연방파 신문을 통해 전국으로 퍼졌고 정치적 스캔들로 번졌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문제 삼았던 부분은 오늘날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오늘날이라면 40대 남성과 10대 소녀의 나이 차이, 그리고 주인과 노예라는 절대적인 권력 차이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백인 사회에서는 대통령이 흑인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는 점과 혼외 자녀를 두었다는 도덕적 문제가 더 크게 부각됐습니다.
노예 여성의 동의와 권리에 대한 문제의식은 거의 없었습니다.

4. 제퍼슨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스캔들이 터졌을 때 제퍼슨의 대응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그는 침묵했습니다.
샐리와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반대로 샐리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명확하게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공식적인 해명문이나 반박 성명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제퍼슨은 원래 정치적 비방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 성향이 있었고, 이 문제에서도 같은 방식을 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스캔들은 그의 정치 생명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제퍼슨은 1804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재선 됐습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백인 남성 노예주가 여성 노예와 관계를 맺는 일이 오늘날처럼 권력형 성착취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5. 당시 여성 노예에게 거부할 자유가 있었을까

샐리와 제퍼슨의 관계를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 보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두 사람의 신분 차이입니다.
샐리는 관계가 시작됐을 당시 10대였고 제퍼슨보다 약 30세 어렸습니다.
무엇보다 제퍼슨은 샐리의 법적 소유주였습니다.
당시 버지니아에서 노예는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됐고, 여성 노예가 주인의 성적 요구를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노예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예가 됐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개인적인 감정이나 애정이 있었는지를 단정하기보다는, 먼저 주인과 노예 사이의 절대적인 권력 불균형을 봐야 한다고 합니다.  
 

6. 200년 가까이 이어진 부정

제퍼슨은 182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샐리와의 관계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후 백인 후손들은 샐리의 아이들의 아버지가 제퍼슨이 아니라 친척인 카 형제 가운데 한 명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샐리의 아들 매디슨 헤밍스는 1873년 신문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토머스 제퍼슨이라고 직접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주류 역사학계는 헤밍스 가족의 증언보다 제퍼슨 백인 후손들의 주장을 더 신뢰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역사학자 아넷 고든-리드였습니다. 그녀는 1990년대 기존 연구가 흑인 후손의 증언을 지나치게 가볍게 취급해 왔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1998년 DNA 연구가 발표되면서 논쟁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7. 1998년 DNA 연구가 밝혀낸 것

1998년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샐리의 막내아들 이스턴 헤밍스의 남계 후손과 제퍼슨 가문의 남계 후손의 Y염색체를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두 계통의 Y염색체가 일치했습니다.
반면 오랫동안 아버지 후보로 거론됐던 카 형제 가문과는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연구진이 토머스 제퍼슨 본인의 DNA를 직접 검사한 것은 아닙니다.
제퍼슨에게 비교할 수 있는 남성 직계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친척의 남계 후손을 이용했습니다. 따라서 DNA 연구만으로 토머스 제퍼슨 개인을 100% 특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샐리의 임신 시기와 제퍼슨의 몬티첼로 체류 기록이 일치했고, 매디슨 헤밍스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DNA 연구까지 더해지면서 제퍼슨이 아버지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결론이 힘을 얻게 됐습니다.
2000년 몬티첼로를 운영하는 토머스 제퍼슨 재단도 관련 기록과 DNA 연구를 종합해 토머스 제퍼슨이 샐리 헤밍스 자녀들의 아버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공식적으로 판단했습니다.

8.. 자유를 쓴 대통령과 자유를 갖지 못한 여성

제퍼슨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다시 결혼하지 않았지만, 몬티첼로에는 샐리 헤밍스가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인정되는 자녀들을 두었지만 제퍼슨은 샐리 해밍스를 끝까지 해방시켜두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이 된 대농장주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법적 소유물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선언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자유조차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제퍼슨이 미국 민주주의와 독립에 남긴 업적은 분명히 큽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인권의 자유에서는  흑인 노예들은 제외되었다는 것이 아주 큰 모순으로 남아있습니다.
결국 샐리 헤밍스의 이야기는 제퍼슨 한 사람의 사생활을 넘어, 자유와 평등을 외친 초기 미국이 실제로는 얼마나 불평등한 사회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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