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사늑약은 조약이 아니었다 — 일본이 침략을 정당화한 첫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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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을사늑약은 조약이 아니었다 — 일본이 침략을 정당화한 첫 수”

by 5914 2025.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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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록이자, 증언이며 때로는 판단입니다.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은 그 어떤 조약보다도 깊은 상처를 남긴 역사적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 조약은 단지 외교권을 빼앗긴 비극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는 불법적인 체결, 무력의 협박, 고종의 부재, 관리들의 분열, 순국과 배신의 선택이 얽혀 있습니다.

오늘 이 글에서는 을사늑약이 왜 불법이었는지, 이 조약이 시대마다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 왜 고종은 서명하지 않았는지, 어떤 이들이 이에 맞서 싸웠으며 결국 조선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깊이 있게 다뤄보려 합니다.

 

1조약이 아닌 '늑약', 불법으로 탄생한 문서

을사늑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기 위해 만든 문서입니다. 공식적으로는 ‘한일협상조약’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실제로는 조선 측의 어떠한 자유의지나 동의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고종 황제는 끝까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조약에 서명한 것은 다섯 명의 대신뿐이었고, 이들은 일본의 협박과 무력 시위 속에서 마지못해 도장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국제법상 조약이란 반드시 국가원수 또는 권한을 위임받은 자의 서명과 비준이 있어야만 효력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으로 파견해 군대를 궁궐 주변에 배치했고, 대신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했습니다. 이를 국제법 용어로 '의사조약(擬似條約)' 또는 '무효 조약(Void Treaty)'이라 부릅니다. 즉, 조약의 외형은 갖췄으나 실질적으로는 **불법이며 강제된 문서**라는 뜻입니다.

2.을사늑약이라는 이름, 시대에 따라 달라진 표현들

을사늑약은 시대와 시선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그 이름들에는 각기 다른 역사 해석과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 을사조약 – 일본 측이나 중립적 문서에서 흔히 쓰인 표현. 하지만 강제성을 은폐하고 조약의 형식을 강조합니다.
  • 을사늑약 –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명칭으로, ‘강제로 맺은 조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 – 일본 외무성의 공식 명칭으로, ‘협상’이라는 단어를 통해 자발적 체결처럼 포장했습니다.
  • 을사보호조약 –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는다는 의도로 붙인 이름. 식민지화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됐습니다.

이처럼 명칭 하나에도 당시의 권력관계와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을사늑약’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조약이 결코 자발적이거나 합법적이지 않았다는 진실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3.왜 고종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는가?

조선의 황제였던 고종은 이 조약에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고, 대신들을 불러들여 “나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고종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국제사회에 이 조약의 무효를 알리려 시도**했습니다. 1907년에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이준, 이상설, 이위종)를 파견</strong하여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호소했습니다. 이른바 ‘헤이그 특사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일본의 분노를 샀고, 고종은 결국 퇴위 압력을 받아들여 물러나게 됩니다. 그의 자리에는 순종이 오르게 되며, 조선의 황실은 더 이상 실질적인 권력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4.무력의 그림자, 그리고 분열된 관리들

을사늑약은 협상이라기보다 **무력 시위 속에서 벌어진 일방적 강요**였습니다. 덕수궁 주변은 일본군과 헌병들로 포위되었고, 대신들은 외부와의 연락이 끊긴 채 중명전에 모였습니다.

당시 관리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 조약에 찬성한 자들: '을사오적'

  • 이완용 – 학부대신, 조약 체결의 실질적 책임자. 이후 총리대신과 한일합방에도 가담.
  • 박제순 – 외부대신, 조약의 외교적 실무자.
  • 이지용 – 내부대신, 조정 통제.
  • 이근택 – 군부대신, 군사 무력 해제에 동조.
  • 권중현 – 농상공부대신, 경제 분야 친일 협조자.

🕯️ 조약에 반대하며 자결한 인물들

  • 민영환 – 고종의 중신. 을사늑약 다음 날 자결. 유서에서 “이완용은 만고역적”이라 단죄.
  • 조병세 – 외교관 출신. 조약 무효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자결.
  • 홍만식 – 지방 고위 관료. 조약에 절망하고 자결.
  • 이준 – 헤이그 특사로 참여, 현지에서 순국.

이처럼, 하나의 조약은 사람들의 운명을 극단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누군가는 출세의 기회를 보았고, 누군가는 생을 마감함으로써 민족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5.을사늑약 이후, 조선은 어떻게 되었나?

을사늑약은 단지 외교권의 박탈이 아닌, 일본 식민지화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일본의 통감정치 하에 놓이게 되었고, 내정 전반에 일본 관료들이 파견</strong되기 시작합니다.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 1910년 한일합병조약으로 인해 완전한 식민지</strong로 전락하게 됩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후 이 조약을 **‘비극의 기원’**으로 기억하며 항거에 나섰습니다.

6.을사늑약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요?

을사늑약은 단순한 외교 문서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무력 앞에 무너진 정의, 양심의 분열, 국민을 외면한 권력자들, 생명을 걸고 싸운 이들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 조약을 '늑약'이라 불러야 합니다. 그것은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이름이며, 오늘의 우리가 민주주의와 주권의 소중함을 배우는 데 필요한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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