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은 우리가 흔히 학문과 저술 활동으로 기억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글만 쓰는 이론가가 아니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방 수령, 즉 현감으로 일하면서도 누구보다 철저하고, 또 실속 있게 백성의 삶을 돌봤던 현장 행정가였습니다. 정약용의 현감 시절은 그 자체로 실학의 현실 적용이자, 조선 후기 수령 행정의 이상적인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1.곡산현에서의 첫 실험 — 직접 걷고, 직접 듣다
1794년, 정조의 명을 받아 정약용은 황해도 곡산현의 현감으로 부임합니다. 곡산은 외지고 험한 산지가 많은 지역으로, 당시 조선의 중앙 정치 무대에서 보면 다소 소외된 고을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곳을 단순한 유배지처럼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곡산을 자신의 실학 사상을 현실에서 실험할 수 있는 작은 실험실로 삼았습니다.
그는 관아에 앉아 보고서만 읽는 수령이 아니었습니다. 관복을 입고 마을을 돌며 백성의 집을 방문하고, 논두렁에 올라 직접 경작 상태를 살폅니다. 백성의 옷차림과 표정에서 삶의 고단함을 읽어냈고, 세금과 부역의 형평성을 점검하며 기록과 실제가 얼마나 다른지를 몸소 확인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당시 수령들 사이에서 이례적인 것이었고, 백성들은 당황하면서도 곧 그의 진심을 느꼈습니다.
2.호구조사, 단순한 숫자가 아닌 사람의 삶을 보다
정약용의 현감 행정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 중 하나는 바로 '호구조사'입니다. 일반적인 수령들은 향리들에게 맡겨두는 호구 조사를, 그는 스스로 나서서 진행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호적은 허위가 많았고, 실제 백성의 삶과는 동떨어진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입니다.
정약용은 백성 한 명, 한 가구를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으로 인식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몇 명인지, 병으로 부역이 불가능한 노인이 얼마나 되는지, 혹은 이주로 가족이 흩어진 경우는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를 세심하게 적어두었습니다. 그는 『목민심서』에서 \"호구는 세금과 부역의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백성의 삶을 들여다보는 창이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실태 파악 없이는 공정한 행정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합니다.
3.억울함을 푸는 재판, 정의를 향한 통치
정약용은 수령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인 재판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사건을 단순히 법률로만 보지 않고, 사건의 배경과 당사자의 처지를 헤아려 판단했습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한 자가 과연 범죄자인가, 아니면 굶주림에 떠밀린 자인가를 먼저 따졌습니다. 거짓 고발, 부당한 형벌, 여성과 노비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도 예리한 시선으로 접근했습니다. 이런 공정한 재판은 백성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을 높였고, 정약용이 떠날 때 백성들이 눈물로 그를 배웅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의 재판 철학은 훗날 『흠흠신서』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조선의 재판제도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는 "의심스러우면 가볍게, 확실하지 않으면 풀어주라\"는 원칙을 강조하며, 억울한 백성을 없애는 것이 수령의 가장 큰 책무임을 강조했습니다.
4.금천현에서의 개혁 — 실천적 행정의 정수
1799년, 정약용은 황해도 금천현의 현감으로 다시 부임합니다. 이때 그는 이미 곡산에서의 경험을 통해 실학 행정의 기본기를 닦은 상태였습니다. 금천은 곡산보다 인구와 면적이 더 넓은 고을로,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행정을 요구했습니다.
정약용은 곡산에서 했던 일을 한층 확장해 나갑니다. 농업 기반을 정비하고, 하천과 저수지 상태를 점검해 수해를 예방합니다. 공정한 세금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부당하게 세금을 많이 낸 백성들에게 환급도 시행합니다. 재판과 민원 해결에도 정성을 기울였으며, 심지어 교육과 교화 사업까지 착수합니다.
이 시기 백성들은 정약용을 단순한 수령이 아닌, '우리 고을의 참된 어른'으로 여겼습니다. 그의 퇴임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 어귀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그의 손을 붙잡고 울었다는 기록은 과장이 아닙니다. 실제로 여러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민간 구전으로도 그의 일화가 전해집니다.
5.짧지만 깊었던 시간, 그리고 그 후의 기록
정약용의 현감 재직 기간은 각각 1~2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다른 수령이 수십 년간 이루지 못한 개혁과 민심 수습을 해냈습니다. 백성들의 신뢰, 실용적 행정의 모델, 그리고 기록으로 남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는 바로 이 짧지만 강렬했던 현감 시절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유배지 강진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고을을 다스릴 때 백성을 다스리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집중했다.\" 그 말은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그의 행정을 정확히 요약한 말이었습니다.
6.수령이라는 작은 자리에서 실학을 실천한 거인
정약용은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말년에는 유배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실학의 정신 속에서 그는 가장 위대한 수령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비록 현감으로 있었던 시간은 짧았지만, 그는 그 시간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그리고 실속 있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유배시절 그는 많은 책들을 편찬하였습니다.
오늘날 지방 행정에 몸담은 이들이 정약용의 행정을 본받는다면, 지역사회는 더 따뜻하고 정의로워질 것입니다. 실학이 단지 학문이 아닌 실천임을, 정약용은 그의 짧은 현감 시절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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