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한 청년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문구를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열악한 작업환경과 법의 무력함에 분노했고, 무관심한 사회와 방관하는 정부에 저항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스물두 살, 한국 노동운동사의 시작을 알린 청년이었습니다.
전태일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닌 수많은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의 사징으로 그래서 그를 기억하고 또 기억하기위해 글을 써보았습니다..
1.인권이 없는 노동현장, 평화시장
서울 청계천에 위치한 평화시장은 당시 봉제 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이름 뒤에는 지옥과도 같은 작업환경이 숨어 있었습니다.
작업장은 대부분 불법 건축된 건물로, 창문 하나 없이 밀폐된 공간이었고, 환기 시설은커녕 냉난방조차 없었습니다. 여름이면 찜통, 겨울이면 냉동고였으며, 먼지와 실밥, 기름이 뒤엉킨 공기 속에서 노동자들은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대부분은 10대 초중반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었고, 임금은 턱없이 낮았으며, 휴식 시간조차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앉을 의자도 없었고, 화장실은 사용이 제한되었으며, 한 달 월급이 겨우 하루 치 식사비 수준이었습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이런 비인간적인 환경이 질병과 사망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폐질환, 시력 저하, 영양실조는 기본이었고, 심지어 작업 중 사고로 사망하거나 생명을 위협받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2.존재했지만 무시된 법, 근로기준법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러한 열악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법이 이미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에는 법정 근로시간, 휴게시간, 최저임금, 산업안전 등 노동자의 기본 권리가 명시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법은 “종이 위의 법”에 불과했습니다. 사업주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고, 감독기관은 이를 묵인했습니다.
“나라에 법은 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전태일은 노동청, 시청, 노동관서에 수차례 진정서를 제출하고, 여공들의 실태를 고발했지만 돌아온 것은 무시뿐이었습니다.
3.“내게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더라면”
전태일은 중학교 1학년 중퇴로 학업을 마친 가난한 노동자였습니다. 정규 교육도, 법률 지식도 없는 그였지만, 그는 스스로 법전을 공부했습니다.
“내게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더라면, 이 모든 법을 더 잘 이해하고, 더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었을 텐데...”
이 말은 그의 일기와 증언에서 반복됩니다. 그만큼 그는 스스로가 무지하다고 느꼈고,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사회와 싸우는 일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근로기준법 조항을 해석하고, 여공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며 “바보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노동자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믿은 건 법이었습니다. 법이 존재하니, 이 사회는 바뀔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4.그러나 그를 지지한 이는 없었다
노동청도, 정치도, 언론도 그의 외침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부 공무원은 그에게 “너 하나 죽는다고 세상이 변하겠느냐”는 비웃음을 던졌습니다.
그는 ‘합법적으로’ 행동했고, ‘공식적으로’ 요청했지만, 세상은 불법을 묵인하고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결국 그는 마지막 선택을 합니다.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자신의 몸에 석유를 붓고, 라이터를 켭니다. 그의 입에서는 마지막으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외침이 터져 나옵니다. 그는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5.전태일의 유언, 그리고 어머니 이소선
전태일은 죽기 전 유서를 남겼습니다. 거기에는 어린 동료들을 위한 미안함, 사회에 대한 분노, 그리고 가장 큰 슬픔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머니, 나는 괴롭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이 유서 한 장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분신이 단지 ‘죽음’으로 끝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녀는 노동 현장을 돌며 아들의 죽음을 알렸고,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전태일의 어머니”에서 “노동자의 어머니”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소선 여사는 1980~200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이 되었으며, 많은 이들에게 “불의에 맞서는 행동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6.바뀌지 않은 현실, 살아 있는 외침
전태일이 외쳤던 근로기준법 준수는 아직도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비정규직, 하청업체 노동자, 택배 기사, 배달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들은 안전 장비 없이 일하고, 휴식 없이 배달하며,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그가 죽음으로 세상에 알린 진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태일의 외침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7.우리는 왜 전태일을 기억해야 하는가
전태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한 추모가 아닙니다. 그가 남긴 외침은 “법이 지켜지는 나라”, “사람을 우선하는 사회”, “정의로운 노동 환경”에 대한 요청이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그는 죽음으로 법을 알렸고, 어머니는 그 죽음을 투쟁으로 바꿨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오늘의 현실 속에서 그 정신을 다시 불러내야 합니다. 그를 기억하는 것은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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