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보다는 인성이 먼저여야 했던 친일파 박마리아
본문 바로가기
근대사

지식보다는 인성이 먼저여야 했던 친일파 박마리아

by 5914 2024. 12. 18.
반응형

박마리아는 뛰어난 재능을 이승만 정권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였고  끝내 아들 손에 죽음을 당하고 만  그래도 친일파 중에 끝이 좀 안 좋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1. 가난이 정말로 싫었던 아이 

1906년  강원도 강릉에서 수많은 악행을 일삼았던 박마리아가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린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한 목사집에 가정부로 들어가 그녀를 키웠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자신이 싫어 아작같이 공부를 하였습니다.   목사는 그녀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끔 도와주었습니다.
보통학교에서 만난  친일파 윤치호의 딸의 도움을 받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 동창생의 도움으로 이화여자 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이 시절의 신 여성답게 사회운동에도 많은 참여도 하였습니다. 
특히 <공창제> 폐지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한때는 이런 적도 있었습니다.
"공창제"라는 것은 나라에서 성매매를 합법화하여 관리하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나중에 일제를 위해 위안부 모집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이화여자전문하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잠깐 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가게 됩니다.

 

2. 박마리아는 엘리트중에 엘리트였다

그녀는 유학시절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오로지   공부만 하였고 결국에는 미국 남부의 명문대학인 "밴더빌트대학교"  박사와석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녀는 정말로 엘리트중에 엘리트였습니다.
그리고 유학 시절  남편이 될 이기붕을 신민회 집회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유학시절  사귀었으나 결혼까지는 가지는 못 했습니다.
 1932년 박마리아는 먼저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이기붕이  귀국하고 이 둘은 다시 만나서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사실 이기붕도 박마리아처럼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아짝 같이 공부하여 미국까지 건너가 공부한 사람입니다.

 

 3. 친일 행동 

박마리아는 결혼 후 학교를 사임하고 기독교여자청년회인 "YMCA"의 총무로 활동하게 됩니다.
한국 YMCA를 일본 YMCA 합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총명한 머리와 능력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데만 이용한 여자였습니다.
박마리아는 조선인들을 민족정신 말살 하기 위해 했던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운동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제를 위해 전쟁협력강요를  돌아다니면서 "어차피 누구나 죽을 거 사나이가 뭐 그리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일제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시고 여자들은 나라를 위해 정신대에 들어오십시오"라는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일제를 위해 적극적으로 정병과 조선 여성들의 위안부를 모집하였습니다.


4. 광복 후 그녀의 운명은?

영원할 것 같은 일제강점기 끝나고 광복이 되었는데  친일파인 그녀의 인생도 끝이 나야 하는 게 맞지만 현실은 이와 반대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인 이기붕과 이승만의 인연으로  더 큰 권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기붕은 여러 사업실패로 별 볼 일 없는 인물이었는데  유학시절 만나던 이승만이 한국에 돌아와  이승만의 비서가 되었고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정권 초기에 반민특위 하여 친일파들의 죄를 심판하려 했는데 이는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실패를 원하였던 사람 중에  박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이기붕은 이승만 정권에 들어서면서 정치인생은 승승장구합니다.  이는 이기붕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박마리아의 내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영부인인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인입니다.
그녀는 이승만을 따라 한국에 들어와 영부인이 되었지만 한국어를 할 줄 몰랐습니다.  이때 그녀 옆에서 통역과 친구가 되어준 여인이 박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방해가 되는 인물은 처단하는 수단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과 남편 이기붕을 정치권 정상으로 올려놓기 위해  프란체스카의 비위 어떻게든 맞혀주었으며 그 보답으로 프란체스카는 박마리아 뜻대로 움직여 주었습니다.
그의 결과로 1949년 이기붕은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고 박마리아 또한 YMCA  회장과 "대한 부인회"의 부회장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 후에도 프란체스카의  신임으로 이기붕은 자유당의 이인자 자리를 굳혔습니다.
박마리아는 1956년 제4대 부통령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을 만들려고 하였지만  장면에게 밀려 실패하였습니다.
박마리아는  선거 실패 이후 큰 아들을 이승만에게 양아들로 입적시켜 이승만 부부와의 관계에 입지를 다졌습니다.
또한 큰 아들 이강석을 부정입학으로 서울대 법학과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서울대생들은 크게 반발하여 수업거부에 들어갔고 결국 이강석은 서울대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강석은 음주운전으로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습니다.
그녀의 부정부패는 온 나라가 알고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프란체스카와 박마리아를  사회의 암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5. 박마리아의 끝

1960년 박마리아는 제5대 부통령선거에서 남편 이기붕을 어떻게든 부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지위력을 이용하고  노골적인 부정선거와 정치깡패 동원까지 해 성공을 합니다만 이 부정선거로 인해 국민들은 분노하게 됩니다.
3.15 혁명 사건에서  4.19 혁명까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대통령 자리를 내려놓고 하와이로 망명하게 됩니다.
한국에 남은 박마리아, 이기붕은 국민들에게 비난을 한 몸에 받아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였으나  1960년 4월 28일에 자택에서 아들 이강석의 해 일가족 모두 총에 맞아 살해당하였습니다. 이 강석 본인도 그 자리에서 자살하였습니다.
박마리아의 최후는 아들에게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녀의 총명한 머리가 어쩜 우리나라의 독이었습니다. 하늘이 그녀에 총명한 머리대신 양심과 인성을 주었으며 그녀로 인해 많은 시대적인 희생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