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주와 와인을 빚은 수도사들 — 기도와 양조 사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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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역사와 술이야기

맥주와 와인을 빚은 수도사들 — 기도와 양조 사이의 이야기

by 5914 2025.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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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가 맥주를 만들었다고?”
이런 말을 들으면 어쩐지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고요한 성당 안에서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수도사들이 직접 술을 만든다니요.
하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이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마시는 맥주와 와인의 역사에는 수도사들의 손길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오늘은 그 흥미롭고 맛있는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1. 왜 수도사들이 와인을 만들었을까?

기독교에서 와인은 단순한 음료가 아닙니다.
성찬식에서 와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며, 반드시 사용되는 성스러운 요소였죠.
그래서 수도사들은 직접 포도밭을 가꾸고 와인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단지 종교 의식을 위한 의무라기보다는, 신의 뜻을 이루는 노동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와인은 그 자체로도 중요한 물품이었습니다.
중세에는 깨끗한 물이 귀했고, 와인은 살균 효과가 있는 위생적 음료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알코올에 약초를 담가 만든 약용 와인은 감기, 복통, 통증, 심지어 우울증 치료에도 쓰였습니다.
수도사들은 스스로 약초를 재배하고 조제법을 기록하며, 약사 역할까지 했습니다.

2. 그렇다면 맥주는 왜 만들었을까?

맥주는 와인처럼 종교 의식에 쓰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수도사들은 왜 굳이 맥주를 만들었을까요?
바로 실생활의 필요 때문입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물이 오염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끓이거나 정수할 개념도 없던 시절, 발효를 통해 세균을 제거한 맥주
물보다 안전하고 영양까지 있는 ‘최고의 음료’였던 겁니다.

게다가 맥주는 비타민 B, 칼로리, 탄수화물이 풍부해
금식을 하는 수도사들에게는 ‘액체 빵’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음식이었습니다.
실제로 금식 기간에는 맥주 섭취가 허용되었고, 일부 수도원은 금식 맥주(Fastbier)를 따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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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수도원에서 맥주와 와인을 동시에 만들 수 있었던 이유

그렇다면 맥주와 와인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각각 만들었을까요?
부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 남부 유럽(이탈리아, 프랑스 등)은 포도 재배가 쉬워 와인을 주로 생산했고,
  • 북부 유럽(독일, 벨기에 등)은 포도 대신 보리가 잘 자라 맥주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중부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포도와 보리 재배가 모두 가능했습니다.
그곳의 수도원들은 와인과 맥주를 동시에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음료는 용도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 와인은 성찬식과 약용
  • 맥주는 일상용 식수, 식사 대용, 건강보조제

마치 종교와 생활, 의식과 현실을 아우르는 두 축이 수도원의 양조장이었던 셈입니다.

4. 수도원이 지역 경제를 이끌다

수도원은 단지 종교 공간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수도원은 ‘자급자족 공동체’였고, 규모가 크면 작은 마을만큼 경제력이 있었습니다.
맥주와 와인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 수도원은 포도, 보리, 홉 등을 재배하고
  • 직접 양조해 판매하거나 나누어 주었으며
  • 지역 주민들을 고용하고 교육하며 일자리를 창출했습니다.

또한 유명한 맥주나 와인을 만드는 수도원에는 순례자, 방문객, 상인들이 모여들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지역 시장과 장터를 활성화시켰죠.

5. 중세의 술 관광? 가능했습니다

“중세에 관광이 있었을까?”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물론 지금처럼 호텔을 예약하고 관광버스를 타는 건 아니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성지를 찾아 걷는 순례 여행을 통해
지금과 비슷한 경제적 활동을 유발했습니다.

수도원은 그러한 순례의 중심지였고,
거기서 빚은 맥주와 와인은 ‘성스러운 기념품’이자 ‘영혼의 치유제’로 여겨졌습니다.

 

6.수도사 = 양조 장인 + 약사 + 마케팅 천재

수도사들은 단지 술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복합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양조 장인: 철저한 레시피 기록과 품질 관리
  • 약사: 약초와 알코올을 이용한 치료제 제조
  • 디자이너: 맥주와 와인 병, 라벨, 보관법까지 직접 고안
  • 마케팅 천재: 입소문을 통한 수도원 브랜드 이미지 구축

지금 우리가 마시는 수제 맥주나 지역 와인의 문화는
이러한 수도사들의 장인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7.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진다

오늘날에도 수도사의 양조 전통은 살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벨기에의 트라피스트 맥주입니다.

  • 생산량은 제한적이고,
  • 수도사가 직접 운영하거나 감독하며,
  • 수익은 수도원 운영과 자선에 사용됩니다.

이 트라피스트 맥주는 지금도 ‘가장 정직하고 신성한 맥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맥주 한 잔, 와인 한 잔을 마실 때
그 안에는 수백 년 전 수도사의 숨결이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단순히 술을 만든 게 아닙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신을 예배하기 위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그 한 잔을 빚었습니다.

그 정신은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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