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한 잔을 기울일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시대의 향과 기업의 역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특히 ‘진로’라는 이름은 단지 술의 브랜드를 넘어, 한국 주류 산업의 상징이자, 한 시대의 부침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장진호라는 인물이 있었다. 영화 <소주전쟁>이 곧 개봉을 앞둔 지금, 우리는 이 브랜드가 실제로 겪었던 ‘전쟁’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1. 장학엽의 사망과 혼란의 시작
진로소주의 창업주는 장학엽이다. 1924년, 평양에서 시작된 진로는 해방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전국구 브랜드로 성장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창업주 장학엽이 세상을 떠나면서 진로는 본격적인 내홍에 휘말리게 된다.
장학엽의 아들 장진호는 당시 너무 어렸고, 경영을 맡기기엔 무리였다. 이에 따라 장학엽의 동생인 장익용이 경영을 맡는다. 그러나 그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장진호는 자라면서 경영권에 대한 야망을 키웠고, 결국 1980년대 중반, 형 장경호와 손을 잡고 작은아버지 장익용을 경영 일선에서 밀어냈다.
장진호는 이후 배다른 형 장경호마저 경영에서 배제하며, 진로의 단독 경영자가 된다. 이로써 장진호는 ‘진로 왕국’의 실질적인 황제가 되었고, 이제부터가 진짜 이야기의 시작이다.
2. 진로그룹의 확장과 탈주류 선언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한국 경제가 전반적으로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다. 장진호는 주류기업이라는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그는 “진로는 더 이상 술 회사가 아니다”라며 이른바 ‘탈주류’를 선언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진로를 종합생활문화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는 전국의 골프장, 물류, 무역, 건설, 방송, 금융, 호텔 등 전 방위로 계열사를 확장해 ‘진로그룹’을 출범시킨다. 마치 대기업처럼 CI도 변경하고, 본사를 서울 강남에 신축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소주 한 병의 이익에서 나온 자금에 의존한 것이었다.
3. 세상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장진호가 경영에 나선 시기는 국내 소주시장이 치열하게 요동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경쟁사인 롯데칠성음료가 처음으로 맥주 시장에 진입했고, 무학의 ‘좋은데이’, 대선의 ‘시원소주’ 등 지방 소주 브랜드들이 각 지역에서 시장을 잠식해 나갔다.
게다가 1997년 외환위기는 진로그룹의 방만 경영에 직격탄이 되었다. 무리한 사업 확장과 고금리 대출, 외화부채 등으로 진로는 급속히 휘청였다. 결국 2000년대 초 진로는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채권단이 경영권을 인수한다.
4. 경영권 박탈과 법적 처벌
진로가 위기에 빠지면서 장진호는 경영권을 상실하게 된다. 특히 2002년, 검찰은 장진호를 배임과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하였다. 그는 진로 본사를 담보로 수천억 원의 사재를 빼돌리고, 계열사 사이에서 자금을 돌려치기한 혐의를 받았다.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형을 선고했으며, 이는 결국 그가 진로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한때 수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던 ‘소주 황태자’는 이렇게 법정 구속이라는 씁쓸한 결말을 맞았다.
5. 장진호의 마지막과 해외 이야기
장진호는 진로에서 물러난 뒤 해외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미국과 중국 등지에서 수산물 수출, 호텔 사업 등을 추진했으나 모두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결국 중국 베이징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언론에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의 퇴장은 그렇게 조용했다. 그의 실패는 단지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맞물린 무리한 확장, 그리고 비전 없는 경영의 말로였다.
6. 살아남은 진로, 그리고 하이트 인수
그러나 브랜드는 살아남았다. 2005년, 하이트맥주가 진로를 인수하며 ‘하이트진로’라는 새로운 법인이 출범한다. 하이트는 진로가 가진 브랜드 파워, 특히 전국 유통망과 ‘참이슬’이라는 절대 강자 브랜드에 주목했다.
‘참이슬’은 1998년 진로가 출시한 제품으로, 곧 전국구 히트작이 되었다. 특히 깨끗한 이미지와 낮은 도수(20도 이하)는 1990년대 말 건강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시장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하이트는 이를 앞세워 소주 시장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지금도 전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소주는 단연 ‘참이슬’이며, 이는 진로의 유산이자 한국 소주의 아이콘이다.
맺으며: 잔에 담긴 제국의 흥망
장진호가 꿈꾸던 제국은 무너졌지만, 진로는 브랜드로 살아남았다. 우리는 한 기업인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진로의 사례를 통해 목도한다. 영화 <소주전쟁>은 픽션이지만, 그 뒤엔 실제 전쟁이 있었고, 그 이름은 바로 ‘진로’였다.
지금 소주 한 잔을 마신다면, 거기엔 실패한 제국의 흔적과 함께, 살아남은 브랜드의 끈질긴 생명이 담겨 있다는 걸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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