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가운데 제임스 먼로는 워싱턴이나 제퍼슨에 비해 낯선 인물입니다. 하지만 ‘먼로 선언’이라는 말은 역사책에서 한 번쯤 접해보셨을 것입니다.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개입에 선을 그은 이 선언은 이후 미국 외교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임스 먼로(1758~1831)는 1817년부터 1825년까지 재임한 미국 제5대 대통령입니다. 독립전쟁에 참전한 건국 세대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워싱턴·제퍼슨·매디슨으로 이어진 버지니아 출신 대통령들의 시대를 마무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의 삶에는 국가의 성장뿐 아니라 전쟁의 상처와 노예제의 모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말년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1. 열여덟 살 청년, 독립을 위해 전쟁터로 향하다
먼로는 1758년 4월 28일,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지니아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에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십 대에 부모를 모두 잃었고, 외삼촌 조지프 존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1774년에는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식민지에서는 영국의 통치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먼로도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776년 학업을 중단한 뒤 대륙군 장교가 됐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워싱턴이 이끄는 군대와 함께 트렌턴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이곳에서 적의 대포를 향해 진격하다 어깨에 총상을 입고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부상에서 회복한 뒤에도 참모로 복무하며 전쟁을 이어갔지만, 전투부대를 지휘할 기회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군인으로서의 진로에서 벗어나 법률과 정치로 활동 무대를 옮겼습니다. 먼로에게 독립은 책에서 배운 이념이 아니라, 직접 피를 흘리며 지켜낸 경험이었습니다.
2. 제퍼슨의 제자에서 외교관으로 성장하다
먼로는 토머스 제퍼슨을 스승으로 삼아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1782년 버지니아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됐고, 이듬해에는 대륙회의에 참여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중앙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을 경계했습니다. 새 헌법의 비준 과정에서 권리장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대한 것도 이러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1786년에는 뉴욕 상인의 딸 엘리자베스 코트라이트와 결혼했습니다. 이후 1790년 연방 상원의원이 되어 제퍼슨·매디슨과 정치적으로 협력했고, 1794년에는 워싱턴 대통령의 임명으로 프랑스 주재 공사가 됐습니다.
그러나 외교관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는 먼로의 태도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던 워싱턴 정부와 충돌했고, 결국 소환됐습니다. 귀국 후에는 자신의 외교 활동을 해명하는 글을 펴냈으며, 1799년부터 1802년까지 버지니아 주지사로 일했습니다.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그는 입법과 행정, 외교 현장에서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3. 제퍼슨이 추진한 루이지애나 매입, 협상을 맡은 먼로
1803년,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미국의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이때 프랑스로 건너가 직접 협상에 참여한 사람이 제임스 먼로였습니다. 당시 먼로는 대통령이 아니라 제퍼슨이 파견한 특사였습니다.
처음 미국의 목표는 무역에 중요한 뉴올리언스 항구와 주변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예상보다 훨씬 큰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오늘날의 루이지애나주보다 훨씬 넓은, 미시시피강 서쪽의 광대한 루이지애나 영토 전체를 팔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먼로는 프랑스 주재 미국 공사 로버트 리빙스턴과 함께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 기회를 받아들여 1,500만 달러에 루이지애나를 매입하는 데 합의했고, 미국의 국토는 거의 두 배로 넓어졌습니다.
루이지애나 매입은 제퍼슨 대통령의 대표적인 업적입니다. 먼로는 그 구상을 현지 협상으로 실현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대통령에 오르기 전 그의 중요한 외교적 성과로 남았습니다.

4. ‘좋은 감정의 시대’에 가려진 경제 위기와 노예제
18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먼로는 이듬해 취임했습니다. 그는 여러 지역을 순방하며 국민을 만났고, 지역 간 화합을 강조했습니다. 반대 정당인 연방당이 쇠퇴하면서 정치적 대립도 이전보다 줄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의 집권기는 ‘좋은 감정의 시대’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1820년 대선에서는 강력한 경쟁자 없이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먼로는 231표를 받았고, 존 퀸시 애덤스에게 1표가 돌아갔습니다. 따라서 ‘무투표 당선’보다는 사실상 경쟁이 없는 압도적 재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러나 국민 모두가 평온했던 것은 아닙니다. 1819년 공황이 발생하면서 은행과 기업이 무너지고, 실업과 농장 압류가 늘었습니다. 전쟁 이후의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던 경제가 크게 흔들린 것입니다.
노예제 문제도 국가를 갈라놓았습니다. 미주리가 노예제를 허용하는 주로 가입하려 하자, 북부와 남부는 상원의 세력 균형을 놓고 충돌했습니다. 1820년 마련된 미주리 타협은 메인을 자유주로, 미주리를 노예주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균형을 맞췄습니다. 또한 루이지애나 매입지 가운데 북위 36도 30분 이북에서는 미주리를 제외하고 노예제를 금지했습니다.
먼로는 타협안에 서명해 당장의 분열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노예제 자체를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정당 간 경쟁이 약해진 자리에서는 지역 갈등과 민주공화당 내부의 권력 경쟁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5. 플로리다 확보와 먼로 선언, 미국 외교의 방향을 세우다
먼로 정부의 주요 성과 가운데 하나는 플로리다 확보입니다. 당시 플로리다는 스페인령이었지만, 국경 충돌이 이어졌고 앤드루 잭슨의 군사행동은 스페인에 대한 압박을 높였습니다.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는 이러한 상황을 외교 협상으로 연결했습니다.
그 결과 1819년 애덤스·오니스 조약이 체결됐고, 1821년 발효됐습니다. 미국이 스페인에 땅값을 직접 지급한 단순 매매는 아니었습니다. 미국은 자국민의 스페인에 대한 배상 청구를 최대 500만 달러까지 부담하는 조건 등을 받아들였으며, 양국의 영토 경계도 정리했습니다.
먼로의 이름을 역사에 더 깊이 남긴 것은 1823년 12월 2일 의회에 보낸 연례교서에서 밝힌 ‘먼로 선언’입니다. 당시 중남미에서는 스페인 등의 지배에서 벗어난 신생 독립국들이 등장하고 있었고, 미국은 유럽 열강이 이 지역에 다시 개입할 가능성을 경계했습니다.
선언의 핵심은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거나 독립국들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도 유럽 내부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이미 존재하던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지를 모두 없애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이 원칙을 독자적으로 강제할 군사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선언은 미국이 유럽과 구별되는 외교적 입장을 내세웠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훗날 미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는 중남미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도 변형됐습니다. 먼로 선언에는 유럽의 간섭을 막는 원칙과 미국 중심 질서의 출발이라는 두 얼굴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