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을 향한 존중, 그 시작은 사랑에서 — 김구와 최준례의 결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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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사람을 향한 존중, 그 시작은 사랑에서 — 김구와 최준례의 결혼 이야기

by 5914 2025.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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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일제의 그림자로 초, 조선의 하늘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 시대에 김구는 감옥살이와 도망, 출가와 환속을 반복하며 세상의 경계 위를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말합니다. 자신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조국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모든 이들을  존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건 그의 아내 최준례 여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 김구 앞에 나타난 당찬 여인, 최준례

그에게 다가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황해도 옹진 출신의 최준례 여사. 그녀는 부모가 이미 짝지어준 혼례를 거부하고  부모의 노여움도 무릅쓰고, 교회의 책벌도 감수하며 집을 나섭니다. 아무런 보장도 없는 30세 중반의 김구의 곁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녀가 김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최준례여사는 자신의 배우자를 자신이 선택하고 싶었던 거 같습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 초반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저씨 같은 김구에게 도망가 김구를 선택을  후회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 그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의 부모의 뜻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했다는 건 정말 큰 용기와 시대를 앞선 여인임을 틀림없습니다. 또한 김구는 그녀를 여자이기 전에, 아내이기 전에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으로 받아들여  한 여인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을  존증해주었습니다. 아니면 내심 고마움이 더 클지 모르겠지만요~

2. 조용한 혼례, 그리고 깨어 있는 말

두 사람은 조용히 혼례를 올립니다. 하객도, 축복도 많지 않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김구는 그 자리에서 한마디를 남깁니다.

“당신도 글을 배워야 해요. 여자도 배워야 세상이 바뀔 수 있어요.”

이 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김구가 당시 조선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던 역할을 정면으로 부정한 선언이었습니다. 당시 집안에서는  딸도 배우기 어려운 시대에, 그는 혼인한 아내에게 학교에 다니라 권한 사람이었습니다. 김구에게 배움은 곧 존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육은, 동등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시대에는 깨어있는 남자들은 딸에게도 고등교육 심지어 유학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자식에게나 해당된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들도 아내에게 배움을  거의 권장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김구는 당시 시대를 앞서간 이들보다 한 발자국 더 앞선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3. 배움과 동지로서의 삶

최준례 여사는 김구의 권유를 따라 학교에 다녔습니다. 경성에서 글을 배우고, 교회 일에도 헌신하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내조자가 아닌, 남편과 함께 사상을 공유하고 시대를 나눈 동지였습니다.

그녀의 이 선택은 곧 끝없는 고생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부모의 보호도, 교회의 후원도 없이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산다는 것은 언제 끝날지 모를 불안과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도 있었고, 아이의 옷을 지을 천조차 구할 수 없는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김구의 아내이자 동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최준례 여사와 김구의 어머니는 단순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넘어선 깊은 정을 나누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하고 불안한 시대 속에서도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배려하며 살았습니다. 김구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단지 아들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람으로 인정했고, 최준례 여사 역시 시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셨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세대를 초월한 여성 간의 연대가 있었습니다. 서로의 고생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존재들이었기에 가능한 동행이었습니다.

김구의 가족 사진

4. 그들의 함께한 시간을 짧고  남겨진 슬픔은 길다

1919년, 김구는 3.1 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합니다. 임시정부의 중추가 된 그는 상하이, 항저우, 충칭 등지를 떠돌며 끊임없이 도피와 조직을 반복합니다. 그의 곁에 늘 최준례 여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며, 짐을 싸며, 망명의 그림자 속을 함께 걸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아내로 산다는 것  정말로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평범한 부부의 삶과는 달랐습니다. 함께 식사를 나누는 시간도 적었고, 편히 대화를 나눌 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동지로 존중하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존재로 살아갔습니다. 그녀는 늘 김구를 앞에 세웠고, 김구는 늘 뒤에서 그녀의 고단함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함께한 시간만은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조준례여사가  상하이  자택에서 낙상하는 바람에  그들의 소중한 시간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924년 1월 1일. 상하이의 한 병원, 낯선 이국의 차가운 겨울 아침. 최준례 여사는 병상에서 눈을 감습니다. 낙상 후유증과 폐렴, 누적된 피로가 그녀의 몸을 서서히 앗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김구는 슬프게도 아내의 마지막을 지키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녀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습니다. 조국도, 남편도 곁에 없는 외로운 이별이었습니다. 

이들의 이별은 그래서 더 아팠습니다. 함께 살았지만, 함께하지 못했던 두 사람. 독립을 향해 달려야 했기에 가정은 늘 뒤로 밀려야 했고, 마음을 나눌 시간은 전선 한쪽에서 놓여 있었습니다.

5. 사람을 완성한 존재

김구는 이후에도 조국을 위해 싸웠습니다.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고, 광복의 전환점을 만들었으며, 끝내 암살되기까지 민족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최준례 여사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침묵은 외면이 아닌 깊은 존중의 형태였습니다.

그녀는 김구에게 가정을 주지 못했을지 몰라도, 그를 완성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상, 철학, 감정, 그리고 삶의 방식까지도 그녀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완성되었습니다. 그녀는 ‘아내’이기 이전에, ‘여성’이기 이전에, 온전한 인간이었으며, 김구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존중했던 인물이었습니다.

 

 

6 우리가 기억해야 할 김구

김구는 독립운동가로도, 정치가로도, 때로는 논쟁적인 인물로도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프레임을 걷어내고 바라보았을 때, 그는 인간을 진심으로 존중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념보다 먼저 사람을 보았고, 그 사람의 선택을 온전히 믿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정신은 한 구호나 문장보다, 한 여인의 결정을 끝까지 지지하고 존중한 태도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그 출발은 최준례 여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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