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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을사늑약(조약)을 주도한 친일파 을사오적 이완용

by 5914 2025.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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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친일파 하면 가장 먼저 이완용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완용이 을사늑약을 주도한 인물로 나라의 원수였습니다. 그저 욕만 하고 싶은 인물이긴 하지만  선과 악을 떠나  이완용을 역사 흐름 속에 한 인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출처: 포토뉴스

 

1.이완용 부잣집으로 입양되다

1858년 어느 가난한 양반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완용이 10살이 되던 해 이호준이라는 먼 친척에게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완용은 가난한 아버지가 아닌 부자 양아버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양아버지인 이호준은 정실부인에게 딸만 셋이 있었고  첩에게 아들 서자가 있었으나 이때는 서자는 대를 잊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호준은 이완용을 양아들로 데리고 와 키웠던 것입니다. 
이호준은 흥선 대원군의 친구일만큼 잘 나가는 집안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완용은 조용한 아이로  자신의 감정  표현을 제대로 못하는 편이었습니다.  양아버지는  말로 자신을 제대로 표현을 못하는 것은 남자의 처세로서 좋지 못한 것이니 고치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을 제대로 표현을 못할지 모르지만 이완용을 영리한 아이였습니다.
이완용은 1882년 과거에 급제하게 됩니다.
이완용의 총명함이 고종에 눈에 들어 빠른 승진과 더불어 고종의 아들 순종의  스승까지 되었습니다.


 2. 육영공원에 입학하다

1886년에 설립되었던 관립학교 육영공원에 이완용은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관료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설립된 학교로 영특한 이완용도 여기에 발탁되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완용은 영어 실력이 뛰어나 1887년 미국주제 공사로 발탁되어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일본 청나라등 여러 나라의 간섭에 벗어나 미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 보내었던 것입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완용은  조선과 전혀 다른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근대화된 강국 미국을 보고서는 자연스럽게 친미파 관료가 되었습니다.
1890년에  미국에서 돌아온 이완용은  고종의 충직한 신하로서  각종요직을 역임하여 미국과 협상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이완용은 이때까지는 미국바라기였습니다.

출처 포토뉴스

3. 아관파천을 주도하다

일본의  시해로 조선의 국모가 죽음을  당한 을미사변 이후 고종도 일본인들에게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이완용은 처음에는 미국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이완용은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것이 아관파천 사건입니다
이때는 이완용은 일본을  적대시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완용은 독립협회에 초대 부회장과 2대 회장을 지내였습니다.
그리고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로 세운 독립문 또한 이완용이 적극적을 추진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이완용이 아니지만 한때 그도 독립이라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4. 전북관찰사에 좌천되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였습니다.  고종을 보호하면서 조선의 각종 이권을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내정간섭도 하였습니다. 조선의 왕실과 이완용은 조선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또 이완용은 미국에 의지하고 싶어 지난  뜻대로 미국은 적극적인  나서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완용의 사리사욕으로 채우기 위해 저질렀던 각종비리들이 발각되면서 결국 전북관찰사로 자천되고 고 말았습니다.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되었습니다.
좌천된 전북관찰사도  2년도 안되어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완용은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생활을 잠깐 하게 됩니다.

출처 포토뉴스

 

5. 이완용 일본을 다시 보게 되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그을 이어 러일전쟁에서도 승리를 하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영국,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완용은 정계에 다시 진출하는 시기였습니다.
아마 그는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 발전시켜서  세계강국에 우뚝 선 일본을 다시 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부터 이완용은 친일파로 돌아서게 됩니다.
"일본이 한국 문제 때문에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 이러한 주장으로 학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을 포함한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을 일본과 체결하여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출처 포터뉴스(노인이된 이완용)

 

6.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완용의 친일 만행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완용은 이토히로부미의  이쁨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내각총리대신으로 특진이 되었고 그 후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친일 만행도 승승장구 하였습니다.
1907년에는 정미 7 조약을 맺어 한국에 행정권을 일본에 넘겼고 군대마저 해산시켰습니다.
1909년에는 기유각서로 한국의 사법권을 이완용의 주도로 일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런 만행으로 그를 암살 시도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완용의 친일 행정에 분노한  독립운동가 이재명이 이완용을 칼로 습격한 사건입니다.  이완용은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큰 부상이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말았습니다.  

살아난 이완용은 1910년 8월 16일 순종을 협박해 한일병합조약에 억지로 도장을 찢게 하여  공식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었습니다.
이완용은 일본으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많은 포상금도 받았습니다,
조선인이 조선인을 감시하는 조선 헌병제를 만들었으며 고종이 사망한 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든 3.1 운동을 제압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일본은 이완용의 적극적인 친일 행동에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급시켜 주었습니다.
이완용은 친일 만행을 할 때마다 받는 포상금들도 어마 어마 하였습니다.
심지어  창덕궁을 일본 황실에 별궁으로 만들자고 적극적으로 2번이나 건의하였습니다.
일본인들도 이것은 아니다 싶어서 일본에서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출처 포토뉴스(이완용 가족)

 

7. 친일 행위로 부풀린 재산 

이완용이 친일행위를 한 이유 중 하나는  돈일 것입니다.  야금야금 나라를 팔아버린면서 받아온 포상금과 불로소득으로 벌어온 돈으로 이완용을 부동산에 투자하였습니다.
당시 이완용이 소유한 부동산의 면적이 여의도 면적에 8배였다고 합니다.
현금 자산도 지금 시세로 600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이완용의 부동산은 해방이전에  거의 다 팔아버려서  회수한 땅은 0.05%에 불과한다고 봅니다.
이완용은 1962년 2월 11일에 67세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장례는 화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무덤 그렇지 않았습니다.  항상  무덤에 칼이 꽂혀있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지속적이 훼손이 일어났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훼손이  더 심해졌습니다.
결국 1979년 그의  증손자 이석형이  이완용의 무덤을 파묘하였습니다.
동아일보는 이완용이 죽은 다음날 이완용을 비난하는 사설을 내보냈습니다.  글 일부에는 "팔아서 안 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완용의  자식들도 이완용의 이어 친일 행위를 했으면 많은 재산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심지어 광복 이후 나라가 회수한 그의 땅도 1993년에  그의 증손자 이윤형이 국가를 상대로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합니다.  그리고  승소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일부 서울에 있는 땅을 팔아 캐나다로 이민 갔다고 합니다, 대부분 그의 자손들이 재산을 탕진하였다고 하지만 사실 그의 재산은 오리무중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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