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조선시대 10대 왕으로 2번에 사화로 많은 사람들을 살사 하였고 각종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 나 백성들을 피폐하게 한 왕이었습니다. 그 옆에서 연산군의 총애를 이용해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렸던 장녹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 장녹수는 첩에 딸로 태어나다
장녹수의 아버지는 양반인 장한필이며 어머니는 천민출신이 첩이었습니다. 조선 시대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가는것어서 장녹수의 아버지가 양반이긴 하지만 어머니가 천민이기 때문에 장녹수역시 천민이었습니다.
장녹수는 살기위해 시집을 여러 번 같으며 먹고살기 위해 몸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흘러 흘러 살다가 왕실의 일가인 제안대군의 노비와 혼인을 하여 제안대군의 사노비가 되었습니다. 장녹수는 자식까지 낳고 살았지만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생이 되길을 마음 먹었습니다.
2. 춤과 노래에 뛰어난 장녹수는 연산군을 만나다.
장녹수는 춤과 노래 실력이 매우 뛰어나 장안에 소문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애까지 난 여인이 춤과 노래로 유명한 기생이 된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분명 사람을 끌리게 하는 타고난 매력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노비이므로 제안대군이 여는 연회에서도 춤과노래를 해야만 하였습니다.
1502년 어느날 제안대군이 베푸는 연회 자리에 조선의 왕 연산군도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은 장녹수의 춤과 노래하는 모습에 홀딱 빠지게 됩니다. 연산군이 장녹수를 원한다는 것을 눈치채 제안대군은 연산군에게 장녹수를 받치게 됩니다.
장녹수가 연산군과 만나는 시기가 연산군이 정치보다는 여인과 술 그리고 가무를 즐기는 것을 점점 더 좋아했던 시기입니다.
장녹수에게 빠진 연산군을 따라 장녹수는 흥청이 되어 궁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자료화면: 영화 왕의 남자
3. 연상인 장녹수는 연산군을 쥐락펴락하다
장녹수는 연산군을 만나를 당시 나이가 30대 였습니다. 나이는 30대였으나 외모는 16세로 보인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그녀는 엄청난 동안으로 추정이 됩니다.
장녹수는 궁안에 들어와 연산군의 마음을 잘 헤아려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 주었습니다. 연산군은 그해 정녹수를 종 4품 숙원으로 책봉을 하여 연산군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바로 신분 상승이 된 것입니다. 장녹수는 연산군 주변에 어린 여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남자를 잘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이 모성애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연산군을 아들처럼 대하였습니다. 때로는 따뜻하게 안아주고 때로는 혼을 내고 벌을 주면서 연산군을 쥐락펴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그해 딸이 태어나게 됩니다. 장녹수는 왕의 자식을 낳았으니 그녀의 권세는 당연히 커지고 있었습니다.
4. 장녹수는 총애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다
연산군은 장녹수에 대한 총애가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 해 갔습니다. 장녹수는 정 4품 숙원에서 정 3품 숙용으로 승진이 되었고 연산군에게 많은 재물들을 하사 받았습니다. 궁밖에 장녹수의 집을 화려하게 지어주면서 화재가 날까 봐 주변의 백성들의 집들을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이 하사한 재물로는 만족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연산군을 이용해 가족과 측근들에게 돈이 관직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당연히 그들은 각종 부패로 뇌물을 받아 부를 누리고 많은 돈을 장녹수에게 상납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나라 세금으로 거둔 쌀을 팔아 장녹수의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불리고 있었습니다.
장녹수의 권세는 대신들 조차 건들기 힘이들 정도였습니다. 더 구다나 1504년 피바람이 불었던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에 광적인 폭정은 더 심해져 대신들은 자신의 목이 날아갈까 항상 조마조마한 상황이었습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광적인 폭정을 이용해 자신의 권세를 열심히 누리고 있었습니다.
연산군이 상식 밖에 일들을 도와 함께 하였고 연산군이 호감을 보이는 여인들을 모함하여 죽였으며 연산군이 변태적인 행동도 아라곳하지 않고 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연산군은 여인들을 좋아해 연산군 말기에는 흥청들이 1만여명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모잘라 대신들의 부인도 탐하였습니다. 연산군이 연회에 대신 부부를 초청하여 마음에 있는 대신 부인을 찍으면 장녹수가 그녀를 슬며시 데리고 나가 연산군에게 받치는 방식이었습니다.
대신들 부인들은 모욕을 당하기 싫어 장녹수에게 많은 뇌물을 받쳤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연산군시대에는 많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자료화면: 영화 왕의 남자
5. 순신간에 돌무덤이 되다.
연산군과 장녹수는 자신의 쾌락으로 망국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대신들은 왕을 바꿔야 한다는 판단을 하여 성종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내세워 1506년 반정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중종반정입니다. 연산군은 그날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어 그해 유배지에서 사망합니다.
장녹수도 연산군과 같이 잡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참수형을 당합니다. 장녹수의 시체는 길 위에 버려졌는데 백성들은 연산군에 원망하는 마음까지 합쳐서 장녹수의 시체 위에 돌을 던져 순식간에 돌무덤이 만들어졌습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을 만나 4년동안 온갖 나쁜 짓으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백성들의 분노의 돌팔매질로 만들어진 무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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