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종 이방원이에게 금쪽이었던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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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태종 이방원이에게 금쪽이었던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시키다.

by 5914 2025.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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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에게는 첫째인 양녕대군이 어느 자식보다 귀한 자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태종은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위 시켰습니다.  
태종은  무슨이유로  양녕대군을 폐위를 시켰는지 알아보겠습니

출처 태종 이방원

1. 여러 아들을  하늘로 보낸 후 얻은 양녕대군 

양녕대군이 태어나 전에 원경왕후와 태종사이에는 아들 셋과 딸 셋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셋은 어린 나이에 모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원경왕후와 태종은 연달아 자식을 잃은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슬픔속에서 희망으로 태어난 것이 아들 양녕대군이었습니다.  이 부부는 양녕대군이 혹 잘못될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키웠으며 태종이 왕이 되기 전에 정도전으로부터 목숨을 위협을  받을 만큼  가장 위태로운 시절 태종에게  웃음을 주었던 아들이 양녕대군이었습니다. 태종은 양녕대군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근심이 사라진다고 할 만큼 양녕대군에 향한 마음이 깊었습니다.
1401년  제 3대 왕으로 즉위한 뒤 3년 후 양녕대군을 1404년에 세자로 책봉합니다, 
태종은 이때까지 양녕대군을 통해 정작자의 계승으로  왕권강화를 꿈꾸었습니다.

 

 

2. 세자로 책봉이 되었지만~

태종은 세자가 된 양녕대군에게  제왕의 교육을 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자의 왕좌교육에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본인 자신인 양녕대군은 공부에 그다지 재능이 있지않았습니다.
양녕대군은 사냥을 좋아했으며 다른 것들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스승들이었습니다.
태종은 양녕대군의 학문의 게으름에  실망이 점점 켜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종은 양녕대군을 어떻게든 왕의 교육을 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너무 공부를 안 하는 양녕대군을 보고서는  극단의 조치로 양녕대군을 모시는 환관들에게  회초리로 때리는 방법까지 썼습니다.
양녕대군을 직접 채벌 하는 것은 왕이 될 사람에게 흠이 생기는 일이므로 그를 대신해  환관들이 채벌을 당한 것입니다.  태은 학문에  성과가 없으면 그의 스승 또한 벌을 주겠다는 엄포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주의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공부할 의지는 그다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양녕대군이 학문에 흥미가 없지만 세자의 기질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녕대궁 14세무렴 태종은 명나라의 사신단의 수장으로 양녕대군을 임명합니다.  양녕대군은  명나라의 황제를 만나 조선의 세자로서의 명목을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국가의 대소사를 주관하면서  후계자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

 

3. 양녕대군 여자에 눈을 뜨다

양녕대군은 14세 나이에 김한로의 딸과 혼례 한 뒤 조금 여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양녕대군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학문보다는  활쏘기 여자에 더욱 심취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양녕대군은 기생 봉지련을 궁안으로 데리고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는 태종의 귀에 까지 들어가고 맙니다.  화가 난 태종은 기생 봉지련을 감옥에  가두었는데  양녕대군은 이에 질세라 반향심으로 단식투쟁합니다.  결국 태종은 아들이 몸이 상할까 봐  기생 봉지련을 풀어주었습니다.
태종의 용서에도 불구하고  양녕대군은 유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세자궁 뒤에 개구멍을 만들어 궁밖을 나가 유흥을 즐기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태종은 양녕대군의 측근에게 벌을 주고 기생은 멀이 보내버리는데  양녕대군이 이에 불만을 품고는 또다시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철없는 세자의 태도를 보다 못한 어머니 원경왕후가  어린 나이도 아닌데 아버지에게 노여움을 끼치냐면서  훈육을 하였습니다. 일단 원경왕후의 중재로 일을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

3. 태종의 협박

양녕대군은 세자궁에서 태종 몰래  매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결국 태종은 양녕대군이 매를 키우다는 사실을 알고 엄청 분노하고 맙니다.
새 한 마리를 키웠을 뿐인데  태종의 분노는 지금까지의  모습과 달랐습니다.
양녕대군이 하도  학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 태종은 개, 매 등을 키우지 말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아들 양녕대군이 아버지 태종의 어명 무시한 것입니다.
결국 태종은 이대로 가면  폐세자 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을 양녕대군에게 하고 맙니다.  긴장하라는 엄포였습니다.  그리고 태종은 양녕대군의 제왕교육시간을 없애버리고 양녕대군을 보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하였습니다.  양녕대군은 위기감을 느꼈는지  이때부터는 학문에 열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양녕대군을 보면서 태종은 다시 양녕대군에게 희망을 걸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종은  양녕대군에게 국정운영에도 참여를 하게 하였는데  나름대로 잘 이행해 나갔습니다.  

4. 어리의 스캔들 

양녕대군이 24살이 되던 해 양녕대군은  도성 안에 어리라는 여인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 여인에 미모가 궁금해 양녕대군은 그녀를 보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녀의 미모는 조선왕족 실록에도 기록이 되어있을 만큼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양녕대군은 어리에게 반하고 말았습니다.
끝없는 구애로 어리의 마음을 얻었고 어리의  남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녕대군을 만나기 전에 이미 고위급 관직의 첩이었습니다.
양녕대군은  이를 알면서도 어리를 궁으로 데리고 와 자기의 여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어린 한나라의 세자가 끝없는 구애를 해오니 어쩔 수 없이 받아 들렸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유교를 중요시하는 나라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양녕대군의 행동은 왕실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행동이었습니다.
당연히 태종의 분노하여 어리를 만남을 도와준 사람들을 잡아와 태형을 행하였고 심지어 참수형까지 명하였습니다.  세자의 간통사건으로 여러 사람들의 목숨이 종이짝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양녕대군에게는 종묘에 가 모든 대신들 앞에서 반성문을 읽게 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태종은 그래도 양녕대군을 폐위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양녕대군 또한 반성하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1년 후 어리가 궁 안에 몰래 살고 있다는 것과  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태종이 알게 되었습니다.  어리를 몰래 들여오는 것을 도와준 사람이 양녕대군의 장인인 김한로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양녕대군은 종묘에서 반성문만 읽었지 뉘우침은 1도 없었고 바로 어리를 궁안으로 데리고 와 몰래  아이까지 낳았던 것입니다.
태종은 정말 기가차는 노릇이었습니다. 이 두부자의  갈등은 깊어만 가고 있었습니다.

5. 결국  폐위시키다

얼마 후 태종의 막내아들인 성녕대군이 죽은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양녕대군이 활쏘기놀이 하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태종은 양녕대군이 사람도 아니라면서 큰 실망의 표현을 하였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넘은 태종은 어리를 궁에서 내쫓아내고 양녕대군을 세자궁에서 가둬두었습니다.
양녕대군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상소문을 올리는데 태종은 이상소문을 읽고서는 결국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상소문의 내용은 왕인 아버지는 궁 안에 많은 여인들을 들이는데 왜 세자인 나는 안 되냐면 내 첩들을 내보내어 나라의 원망이 가득하다며  아버지의 잘못이 더 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태종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양녕대군의 세자폐위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대신들은 반대를 하였지만 태종의 마음은 굳건하였습니다. 
1418년에 6월 3일 폐위하고 경기도 광주로 추방하였습니다. 
그리고  태종은 폐세자에게 양녕대군이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

6. 충녕대군을  후계자로 삼는다.

맨 처음에는 정작자의 계승으로 양녕대군의 아들을 다음 후계자로 논의하였으나  대신들의 입장에서  폐위시킨 아들이 왕이 된다는 것은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와 태종의 아들 중 어진 자로 삼으라는 청을 태종에게 올립니다.  이 어진 자는 훗날 세종대왕이신 태종의 셋째 충녕대군입니다.
이는 태종은 물론이고 모두들 충녕대군을  세자를 세울 목적으로 논의하였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충녕대군은 태종이 바라는 왕의 자질을 갖춘 아들이었습니다.  
충녕대군은 세자로 오르지 얼마 안돼 바로 1418년에 8월에 왕위에 오르고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훗날에도 양녕대군의 행동은 거침이 없어지만  동생인 세종은 눈감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양녕대군의 어리라는 여인은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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