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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친일파 박제순을 향한 손자 박승유의 외침, ‘나는 그를 조상이라 부르지 않는다’

by 5914 202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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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중에 한사람인 박제순의 친일파 행보와 박제순를 가문의 수치라고 말한 그의 손자 박승유가 얼마나 많은 원망을 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자료 출처: 포토뉴스

 

1. 출생과 성장: 박제순의 초기 생애

박제순(朴齊純)은 1858년 10월 7일,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유서 깊은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유교 경전을 익히고 학문에 힘썼습니다. 조선 후기의 혼란기였던 이 시기, 많은 양반 자제들이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고자 하였고, 박제순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문관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조정 내에서 외교와 관련된 사안에 관여하게 됩니다. 특히 국제 정세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던 능력과 언변은 고종의 눈에 들게 된 배경이 되었습니다.

 

 

 

2. 김윤식과의 관계: 온건 개화파와의 엇갈림

박제순은 정치적으로 온건 개화파 인물들과 접점을 가졌습니다. 특히 김윤식(金允植)과는 외교노선에서 차이를 보였지만, 조정 내에서 함께 일한 바 있습니다. 김윤식은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화 외교의 유지와 점진적 개혁을 지향했지만, 박제순은 일본과의 외교에서도 실리를 추구하는 방향을 선호하며 친일 경향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조선 말기 외교 및 교육 개혁 등 일부 사안에서 협력했으나, 1900년대 이후 정치적 입장 차이로 사실상 결별하게 됩니다.

3. 승진과 외교 업무: 고종의 신임을 받은 인물

박제순은 외교 문서 작성과 대외 협상에 능하여 고종 황제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1890년대 말부터 외무부와 의정부에서 활동하며, 점차 중앙 외교 실무를 총괄하는 역할로 올라섭니다. 특히 1901년에는 외무대신에 임명되며, 대한제국의 외교 전권을 사실상 장악하게 됩니다.
고종은 러시아·일본·청나라 사이의 복잡한 외교 환경에서 박제순이 외교적으로 균형을 잡아주길 기대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는 일본 편향의 외교 정책을 주도하게 됩니다.

자료 출처: 포토뉴스(동학농민 탄압 , 개화파 지식인 김윤식)

 

4. 동학농민운동 시기: 민중 탄압의 책임

박제순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직자로서 이 운동을 진압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는 군대 파견 및 민란의 강경 진압을 지시한 보고서에 이름을 올린 바 있으며, 이 과정에서 다수의 농민과 민중들이 희생되었습니다.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발생한 2차 봉기 당시, 동학 세력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한 정치 세력 중 하나로 지목되었으며, 이는 이후 친일 세력과 연결되어 민족 반역자의 전초 단계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됩니다.

 

 

 

5. 본격적인 친일 행위: 을사늑약과 을사오적

박제순의 이름이 역사에 매국노로 남게 된 결정적 사건은 바로 1905년 을사늑약(을사조약) 체결입니다. 당시 그는 외무대신으로서,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강제로 체결을 요구하던 조약의 최종 서명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행동으로 비판받았습니다:

  • 조약 체결 당시 반대 의견을 제기하지 않음
  • 고종의 재가 없이 서명
  • 일본으로부터 훈1등 서보장을 수여받음
  • 조약 이후에도 일본의 정책을 적극 지지

이로 인해 그는 을사오적(乙巳五賊)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되며,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대표적인 민족 반역자로 규정됩니다.

6. 관직에서 물러난 이유: 외교 실패와 비판 여론

을사늑약 체결 이후 박제순은 일본의 외교 고문 자격으로 계속해서 정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국민적 반발과 조정 내 반대 여론이 높아지면서, 그는 점차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고, 결국 몇 년 후 공식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순종 황제 체제에서도 그는 더 이상 영향력을 유지하지 못했고, 1916년 은둔 생활 속에 사망하게 됩니다.

자료 출처: 나무위키

 

7. 손자 박승유의 평가: 후손의 고백과 비판

박제순의 손자 박승유(朴承宥)는 대한민국 교육계에 몸담으며, 일제의 잔재 청산과 역사 교육에 힘쓴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가문의 이름은 박제순으로 인해 오점이 되었다.”
“그를 조상으로 존경하지 않으며, 그 선택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

박승유는 가족 내에서도 할아버지의 친일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몇 안 되는 후손 중 한 명이며, 이 같은 행보는 당시 친일 후손들의 침묵 속에서 매우 이례적이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평가받습니다.

8. 죄를 씻기 위한 행동: 후손의 역사적 사명

박승유는 박제순의 후손으로서 단지 비판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육자로서 역사 교육의 강화, 친일 인물의 교과서 제외 주장, 한국 근대사 관련 연구에 참여하며, 다음과 같은 행동을 통해 가문의 죄를 씻고자 했습니다:

  • 역사학자들과의 공동 포럼 개최
  • 친일 인물 재정리 및 과거사 청산 논의 참여
  • 자신이 속한 학교와 기관에서 ‘박제순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숨기지 않음

이러한 박승유의 행동은 후손도 역사에 책임이 있다는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결론: 박제순의 선택, 박승유의 용기

박제순은 조선 말기 대한제국의 외무를 총괄하던 고위 관료였으나, 결국 민족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그의 출세는 결과적으로 국민을 저버린 선택으로 귀결되었고, 을사오적이라는 치욕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반면, 그의 손자 박승유는 후손으로서 과거를 숨기기보다 정면으로 마주하고, 공개적으로 반성하며, 교육과 활동을 통해 역사적 책임을 실천했습니다.
박제순과 박승유.
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지 한 인물의 전기나 비판이 아니라,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후손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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