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중에 한 사람인 이근택은 처세술 하나로 관직에 올랐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구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뛰어나게 잘 아는 인물 있었습니다. 이근택은 어떻게 관직에 올랐는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1. 날마다 생선을 받쳐 명성황후의 눈에 들다
이근택은 충청북도 충주에서 1865년에 무인집안에 태어났습니다. 어렸을때 이름은 이근용이었으나 30대 후반에 이근택로 계명하였습니다. 이근택이 17세인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민 씨 집안사람들은 공격을 당하였고 명성황후까지 제거하려고 해 명성황후는 급히 도망쳐 충주 장홍원에 사는 친척 민응식의 집에 은신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옆 동네에 살았던 김근택은 명성황후가 민응식 집에 은신하였다는 정보와 명성황후가 생선을 정보를 듣고는 이근택은 명성황후가 한양으로 복귀할때까지 매일 싱싱한 생선을 받쳤습니다.
지금은 유통이 좋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내륙지방에서 싱싱한 생선을 구하는것은 보통 정성으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정성이 통하였는지 명성황후는 궁으로 돌아가 이근택을 잊지않고 1883년 남행선전관이란 관직을 주었습니다. 비로 말단자리이지만 관직 생활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다음 해 과거시험을 봐 참상선전관으로 승진을 하였습니다. 명성황후가 길을 관직의 문을 열어주었지만 아직을 빠르게 승진을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경복궁 안에서 시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2. 명성황후의 유품으로 고종의 환심을 사다.
이근택은 명성황후의 줄로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명성황후의 죽음으로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이근택이라는 사람이 운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얼마 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비단에 곱게 수가 놓인 피 묻은 여인 치마 허리띠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근택은 이 물건이 명성황후가 죽을 당시에 착용한 허리띠임을 바로 알고서는 어마 어마하게 비싼 가격으로 구매를 합니다. 그리고 그 허리띠를 고종에게 하사 하였습니다. 고종은 허리띠가 명성황후의 유품인 것을 알고서는 아들 순종과 함께 목놓아 울었습니다.
이후부터 이근택은 고종을 옆에서 모실 수 있는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합니다. 고종이 일본을 눈을 피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하는 아관파천 사건 때 고종을 안전하게 모셨던 사람이 이근택였습니다.
이때 이근택은 고종을 열심히 섬기어 출세를 하고 있었기에 아직은 일본을 적으로 두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이근택은 명성황후 제사를 지내는 기회를 잡아 고종의 황궁을 도모하다가 이용태의 밀고로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지만 32세 1897년 민영기에 의해 유배지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이듬해 1898년에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데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한성판윤, 경무사 등에 임명되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 정도입니다. 그 후 이근택은 고종의 비호를 받으면서 주로 군사부문의 주요 관직들을 역임하게 됩니다. 그러다 1905년 군부대신 현 국방부 장관급으로 오르게 됩니다.
3. 이근택 냉큼 친일파 되다.
이근택이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종과 함께 러시아의 편에 있었으나 러. 일 전쟁 이후 이제는 일본이 대세라는 것을 알고 고종을 버리고 일본의 편에 서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친일파 견향이 강한 인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일본정부에 환심을 사는데 노력을 하였습니다. 1905년 11월 그는 이완용과 더불어 일본에게 매수당하여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지지의사를 밝혀 지금은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기록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근택은 일본에게 자신이 러시아가 아닌 일본 편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더 저 극적으로 을사조약 체결에 협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근택을 일본에게 30만 원을 받는 조건으로 궁중의 모든 기밀사항을 제보하였습니다. 을사조약 이후 이근택은 더 열심히 친일을 하기 위해 일본군 사령관 요시미지와 의형제를 맺었고, 이토 히로부미와는 부자의 연을 맺어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근택이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집으로 와 상황들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해 주면서 앞으로 우리는 더 잘게 될 거라고 얘기를 하자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며느리가 데리고 온 여종이 화를 내면서 "내 비록 천인이지만 개, 돼지만도 못한 놈에 종이 될 수 없다" 면서 원래 옛 주인에게 돌아갔다는 애기도 있습니다. 그만큼 이근택의 만행으로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41세에 이근택은 자택에서 기산도에게 습격을 받아 13군데나 칼에 찔렸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기산도를 직접 신문 아니 심한 고문을 하였습니다.
이근택은 친일파로 돌아서면서 고종을 기만하는 태도가 너무 심해 민중의 분노로 한때 관직을 파면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45세인 1910년 이근택은 한일병합에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작위가 미국공책 5만을 하사 받았습니다. 같은 해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매년 1600원에 수당을 받았습니다.
이후 열심히 친일 행위를 하면서 호화롭게 지내다가 1919년 54에 사망하였습니다.
4. 이근택의 가족들
이근택이 사망 후 그의 작위는 아들 이창훈이 대를 이어받아 해방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이근택의 형과 동생도 한일합방 이후 자작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이근택의 5형제 모두 친일파가 되어 많은 부귀여 화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이들을 "오귀"라 하여 다섯 귀신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이 형제들의 후손들은 2005년까지 정부를 상대로 선대의 땅을 돌려달라는 9건의 소송을 내기도 하였지만 2007년 대한민국 친일 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근택과 이근상 소유의 토지를 국가가 귀속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부귀영화를 위해 명성황후에 입김으로 말단 관직에서 고종을 거쳐 일본에 열심히 아부를 하면서 살았던 이근택의 뻔뻔함에 당시 민중들은 얼마나 치을 떨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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