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엔 멋을 내기 위한 패션 아이템으로 여겨지는 ‘가발’이지만, 사실 그 탄생과 대중화에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충격적인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바로 매독이라는 무서운 병이 가발을 유럽 전역에 퍼지게 만든 원동력 중 하나였습니다. 가발은 질병을 감추기 위한 도구에서 시작되어, 권력과 사치의 상징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죠. 이 글에서는 ‘매독’과 ‘가발’의 역사적 관계, 그리고 여기에 얽힌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 그 비밀스러운 흐름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1.머리카락을 잃은 왕들, 그리고 가발의 등장
유럽에서 매독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말, 신대륙과의 접촉이 시작된 시기와 맞물립니다. 전파 속도는 무서울 정도였고, 치료제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부 궤양, 탈모, 코 붕괴 같은 외형적인 손상이 빈번히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가발(wig)이란 도구가 사회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가발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프랑스의 루이 13세입니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탈모로 고생하였고, 이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쓰기 시작했지요. 그 뒤를 이은 루이 14세(태양왕)는 아예 왕실과 귀족 사회 전반에 가발 착용을 의무화하며, 화려하고 거대한 가발을 권위의 상징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사실은, 이 귀족적 ‘멋’의 뿌리가 매독으로 인한 외모 손상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2.여성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고통과 미학 사이
매독은 남성에게만 국한된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시의 여성들, 특히 하층 계급이나 성 노동에 종사한 여성들은 매독에 더욱 쉽게 노출되었습니다. 이들은 탈모와 피부병을 겪었지만, 사회적 보호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을 치장하거나 감추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상류층 여성들도 가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성용 가발은 단순히 머리를 덮는 수준이 아니었죠. 점차 시간이 지나며 가발은 조형 예술처럼 발전하게 됩니다. 높이 수십 센티미터에 달하는 가발에는 새장을 올리고, 조선(帆船)을 얹고, 심지어 꽃밭을 재현하는 등 극단적인 장식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가발 패션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그녀는 가발을 단순한 탈모 은폐 수단이 아니라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받아들였고, 당시 파리 여성들 사이에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인간이었고, 탈모나 피부 트러블을 겪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매독에 걸렸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아마도 그녀는 가발을 패션으로 받아 들려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나 패션은 그녀에게 고통을 감추기 위한 또 하나의 가면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잊혀진 왕들, 매독에 무너진 권위
가발의 역사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흥미로운 인물들이 더 존재합니다. 예컨대 영국의 찰스 2세는 사교계의 화려한 왕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성병을 앓으며 그 증상을 감추기 위해 가발과 화장을 사용했습니다. 18세기 유럽의 여러 궁정 인물들—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귀족들—역시 매독으로 인한 탈모와 피부 손상을 감추기 위해 풍성한 파우더 가발을 착용하곤 했습니다.
또한 피터 대제(러시아) 역시 서구화를 추진하면서 유럽식 가발 문화를 수입했는데, 이는 단순한 문화적 이식이 아닌, 질병을 감추는 ‘서구식 위생과 체면 문화’의 이식이기도 했습니다.
4.무게 3kg, 파우더와 납, 향수… 머리 위의 고통
당시의 가발은 지금처럼 가볍고 편한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고급 가발은 말 털이나 염소털로 만들어졌고, 이를 하얗게 보이게 하려고 파우더를 뿌렸습니다. 이 파우더에는 쌀가루나 밀가루 외에도 납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것이 추가적인 피부병을 유발하는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향수를 뿌리는 이유도 따로 있었는데요, 가발은 자주 세척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악취와 벌레가 꼬이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럽에서는 벼룩 제거용 은제 벼룩집게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기도 했습니다.
5.혁명과 함께 사라진 가발의 권위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며, 가발 문화도 점차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귀족을 상징하는 사치품이었던 가발은 검소와 평등을 외친 혁명 정신에 부합하지 않았고, 자연스러운 머리 스타일이 유행하기 시작했죠. 이로써 가발은 사회 전면에서 퇴장했지만, 법조계나 의례적 공간에서의 상징물로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발이 남긴 유산은 단순한 머리 장식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통을 감추기 위한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상징이며, 병의 흔적이 어떻게 권위와 미로 전환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입니다.
6. 머리카락에 덧입힌 문명의 이중성
오늘날에도 우리는 외모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합니다. 탈모 치료제, 헤어 익스텐션, 가발 산업은 여전히 성장 중이며, 그 배경엔 누군가의 불안과 콤플렉스가 존재합니다. 가발의 역사는 단순히 머리카락을 덮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존감과 사회적 이미지, 위신까지 포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감추고 싶은 매독이라는 병이 있었죠. 하지만 그 감춤이 너무도 화려하고 아름다워졌기에, 가발은 결국 병의 흔적이 아닌, 미의 상징으로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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