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명의 소녀를 죽이고, 그 피로 목욕을 즐긴 여인."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소개하는 이 한 줄의 문장은 수많은 다큐멘터리, 소설, 게임, 영화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기네스북에 오른 여성 연쇄살인범’이라는 말로 인터넷을 떠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알고 계셨나요?
그녀가 남긴 ‘피의 전설’이 모두 허구일 수 있다는 사실을요.
1.전설의 시작: 피의 목욕, 650명의 희생자
헝가리의 귀족 여성, 바토리 에르제베트(1560~1614).
그녀는 당시 유럽 귀족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고, 막대한 재산과 지식, 그리고 정치적 독립성을 갖춘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남긴 전설은 끔찍합니다.
하녀들을 고문하고, 손톱을 뽑고, 가위로 살을 잘라내고, 벌거벗긴 채 추운 밖에 세워 얼어 죽게 했다는 고발.
심지어는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처녀의 피로 목욕했다는 소문까지 퍼졌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굳히는 데 결정적인 숫자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로 650명입니다.
그녀의 하인이 고문을 당하던 중 “바토리 부인이 희생자의 명단을 수첩에 적어두었다”고 말했고,
그 숫자가 바로 650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녀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여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2.그런데... 시체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이 끔찍한 전설은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아왔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죄를 뒷받침할 직접적인 증거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650명의 시신?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수첩? 존재 여부가 불확실합니다.
재판? 열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녀 자신은 한 번도 법정에 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체포 당시 성 안에서 피해자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것은 모두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녀는 헝가리 최고의 법관이었던 투르조 죄르지에게 체포된 뒤,
자신의 성 안의 방 한 칸에 감금된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3진짜 괴물은 누구였을까요?
이쯤에서 질문 하나를 던져보겠습니다.
그녀는 왜 재판을 받지 않았을까요?
당시 헝가리 국왕이었던 마티아스 2세는 에르제베트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수많은 성과 영지, 토지를 보유한 막강한 귀족이었습니다.
왕은 그녀를 법정에 세워 유죄를 입증하기보다는,
조용히 ‘괴물’로 낙인찍고 재산을 정리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게다가 마티아스는 그녀를 체포한 대가로,
바토리 가문에 “왕이 진 빚을 포기할 테니 재판을 하지 말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 거래는 이루어졌고, 에르제베트는 공식 기록에서 사라졌습니다.
4.귀족의 딸들까지 희생됐다는 소문
바토리의 전설에 불을 붙인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녀가 하녀뿐 아니라 귀족의 딸들까지 죽였다는 것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렇습니다. 처음엔 마을의 평민 소녀들을 하녀로 고용해 학대하고 살해하던 그녀가,
점점 인근 마을에서 하인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의 딸들에게 손을 뻗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가 결정적이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평민이 죽을 때는 침묵하던 귀족 사회가,
자신들 딸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즉각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국왕 마티아스는 이때서야 투르조에게 체포를 명령하고, 본격적인 압박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이야기에도 증거는 없습니다. 이름이 밝혀진 귀족 소녀도 없고,
부모가 공식 고발한 기록도 없습니다.
오직 남은 것은 투르조가 남긴 보고서에서 \"귀족 소녀들도 사라졌다\"는 모호한 문장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이 소문이 돌고 며칠 후, 그녀는 체포되었습니다.
5.시대가 만든 괴물, 혹은 희생자
21세기의 우리는 그녀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사이에 서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녀를 역사상 최악의 여성 연쇄살인마로 규정하는 시선입니다.
수백 명을 고문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죽였으며, 피로 목욕했다는 이미지.
이는 영화나 게임에서 즐겨 다뤄지는 그녀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그녀를 남성 중심 귀족 사회가 만든 희생자로 보는 시선입니다.
학식과 독립성을 갖춘 여성이 당시 남성 권력자들에게 위협이 되었고,
마녀사냥처럼 조용히 제거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여성은 순종적이어야 했습니다.
바토리는 그 기준에서 벗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귀족 가문의 독립적 영주였고, 남편이 죽은 후에도 성을 통치하며 정치를 했으며,
심지어 국왕에게 돈까지 빌려줄 정도로 막강한 존재였습니다.
그런 여성을 경계하고 두려워한 시대는, 그녀를 괴물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6.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은 진짜일까요?
‘피로 목욕을 했다’는 이야기조차 그녀가 죽고 100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합니다.
그녀가 죽었을 당시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후대의 사람들이, 그녀를 흡혈귀 전설과 연결시키며 문학적 상상력으로 가공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역사로 착각하며 믿어왔습니다.
그녀가 정말 수백 명을 죽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증거도, 시체도, 수첩도, 재판도 없이 전설만 남은 사건을 두고 확신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때로는 역사가 가장 잔혹한 소설보다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
7.괴물이 된 여자, 혹은 괴물로 몰린 여자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단순한 연쇄살인범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권력, 젠더, 계급, 정치가 복잡하게 얽힌 중세 유럽의 단면이었습니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묻습니다.
그녀는 괴물이었을까요?
아니면 괴물로 몰려 침묵 속에 갇혀 죽어간 또 하나의 ‘중세의 희생자’였을까요?
그 답은, 오늘날의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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