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란 살육의 땅이라는 뜻으로 캄보디아가 국민이 3년 9개월 동안 민간인 학살을 당한 참극이었습니다. 적게는 50만 명에서 많게는 250만 명이 캄보디아 민간인들이 죽었을 만큼 지옥이 되어버린 캄보디아의 참사와 이런 지옥을 만든 폴 포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1. 폴 포트는 어떻게 지도자가 되었나?
캄보디아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였지만 시나누크의 독재에 이어 옆나라인 베트남 전쟁에 휘말려 미군들의 공격으로 인해 캄보디아 토지를 초토화 시켜으며 많은 사람들을 사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쌀이 주 수출국이었던 캄보디아의 경제에도 악역향이 발생하게 되어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반민 감정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시아누크 독재도 론 놀 장군의 쿠데타로 물러나게 됩니다. 친미 정책을 앞세원 론 놀 정권이 들어 서게 되지만 캄보디아 사람들이 삶이 좋아질 기미는 안보였습니다. 미국은 캄보디아 지역을 초토화를 만든 보상금을 지불하지만 그 보상금은 국민이 아닌 정부 고위 관리 주머니에 들어가 버릴 만큼 롤 논 정부의 부정부패는 날로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환에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 정권을 다시 잡게 됩니다.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입니다.
2.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
킬링필드의 주범이었던 폴 포트는 캄보디아 왕족과도 연결이 되어있을 만큼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샬롯 사(Saloth Sar )인데 스스로 폴 포트(Pol Pot)라고 부르게 하였습니다, 정치적 잠재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폴 포트는 상류층들만 다니는 사원학교에 다니기도 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서구식 교육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폴 포트는 프랑스 유학시절 마르크스 클럽에 들어가 공산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파리는 공산주의 열풍이 일어나고 있었고 모두가 평등하게 나눠가진다는 이 슬로건이 모두이에게 매료시키는 사상이었습니다. 폴 포트는 마오쩌둥과 스탈린을 모티브 삼아 캄보디아에도 공산주의 정책을 실시하려는 결심을 합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국내에 있는 공산당에 입당을 한 후 1967년에 공산당 내에 크메르 루주라는 인민해방국 조직을 결성합니다. 이때부터 무장투쟁으로 공산주의 혁명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론 놀 정권에 쫓겨난 시아누크의 왕과 손을 잡아 국민들 그의 지지를 받아 내면서 반미감정이 더 해져 크메르 루주의 세력들이 더 욱 더 커져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론 놀정권과 크메르 루주는 몇 년간 내전을 일으켰지만 1973년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론 놀 정권을 지원하였던 미국이 지원도 끊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주가 실권을 장악해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입성하였습니다.
3. 유령 도시가 된 프놈펜
캄보디아는 킬링필드 학살이 일어나기 전에도 충분히 고통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미 내전으로 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땅이 초토화가 되어 농사를 불가능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크매로 루주가 론 놀 정권 물리치고 프놈펜에 입성하였을 때 시민들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그들을 환호하였습니다. 그러나 폴 포트 가장 먼저 한 일을 론 놀 정부의 잔재 청산 명분 아래 공무원, 정치인, 경찰관, 군인등을 찾아내어 처형을 합니다. 그렣게 죽은 사람들이 약 7000여 명입니다.
이것은 시작의 서막이었습니다. 폴 포트는 자신의 유토피아 공산주의를 만들기 위해 프놈펜에 거주한 사람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시민들은 얼떨결에 강제로 이주를 하게 되는데 사람들이 따르게 된 이유는 철수한 미군들이 공격하러 온다는 거짓말을 흘려기 때문에 순수히 이주에 동참하였지만 아무것도 챙겨 나오지 못하고 맨몸으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 계속 걷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폴 포트 계획대로 프놈펜은 유령도시가 되어버렸습니다.
4. 폴 포트의 꿈꾸는 공산주의 유토피아
폴 포트는 철저한 공산주의를 만들기 위해 모든 사람을 노동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순수한 노동자만이 국가를 꾸려 나갈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외국 지식, 물류에 접한자 들은 순수한 노동자가 될 수 없다며 그들을 찾아내 처단하였습니다. 물론 프랑스 유학파였던 폴 포트와 그을 따르는 사람들은 제외가 되었겠죠~순수한 노동자로 살기 위해 탐욕을 없어야 하므로 가난을 추구해야 한다는 논리로 국민들에게 강제 노동을 착취하였습니다. 이젠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인 인권은 하나도 없이 오로지 노동만이 남아있었습니다.
폴 포트는 기본적인 가정을 없애버리고 학교도 모두 폐쇄 시켜버립니다, 오로지 육체노동만이 교육에 속하게하였습니다
댐이나 철길 공사도 도구와 기계 없이 맨손으로 공사를 실행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만든 도구를 사용해서는 안돼다는 이유입니다. 또 아이들을 모아 따로 공산주의 교육을 시켰으며 옳고 그름이 아직 판단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어른들을 감시하는 역할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살인 병기로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폴 포트의 정책으로 모든 사람이 노동으로 잘 먹고 잘 살아도 이건~
그러나 모두가 농사를 지어도 쌀 생산량은 늘어나지 않아 심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굶주림은 생활이 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지만 폴 포트는 아무런 대책을 세워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크메르루주의 노예였습니다.
가정을 파괴하고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은 폴 포트는 그래도 노동력을 위해 인구 증가를 시키기 위해 강제 결혼을 선택하였는데 군인들이 마음에 드는 여인과 무조건 결혼을 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이로 인해 캄보디아 여자들은 아무 선택권 없이 강제 성폭행을 당하는 일이 태반이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을 낳은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5. 반현명 세력의 숙청의 관풍
크매로 루주와 폴 포트의 강압적이 통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뜻과 달리 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반현명 세력들이 인민들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즉 반현명세력들을 찾아 숙청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현명자들로 구분되는 사람들은 의사, 변호사. 수도승, 교사, 공무원, 지식인, 외에도 손이 하얀 사람, 용감한 사람, 정이 많은 사람, 안경을 쓴 사람, 게으른 사람, 재주가 많은 사람등 이외에도 어이없는 조건을 붙여 사람들을 숙청하였습니다. 그 사람들만 숙청한 것 뿐만 아니라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이유로 그의 가족까지 찾아내 숙청을 아니 잔혹한 방법으로 살인을 하였습니다.
6, 투올 슬렝(S-21) 강제 수용소
크메르루주는 베트남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베트남을 공격하지만 미국과의 전쟁으로 싸움에 인숙 한 베트남을 이기기는 크메르루주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베트남은 크메르 루주와 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비난의 반전시키기 위해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 안에 있는 한 수용소를 공개합니다,
학교로 추정된 투올 슬렝 수용소 안에는 시체들이 흩어져 있어으며 감옥방마다 시체가 늘어져 있고 그 옆에는 까마귀가 있는 관경이었습니다. 각종 고문도구 그대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곳곳에 죽어가는 아이들도 발견되었 습니다. 이곳에서는 아무런 근거 없이 반현명으로 의심된 자들과 스파이이라고 의심된 자들의 자백을 받기 위해 갖은 고문을 실행한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의 수는 1만 4천여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곳과 유사한 수용소는 캄보디아의 200여 곳이 있다고 합니다.
이곳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는데 끌려온 사람들을 사진을 찍는 사진사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만이 살아 남고 모두 죽었다고 보면 됩니다.
고문이라는 단어 자체가 공포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일 때도 총알이 아까워 다른 도구를 만들어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세계인들이 경악할 만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투올 슬렝에서 죽음 당한 시체들은 약 15km 정도 떨어진 쯩아익 라는 곳에 암매장을 하여 1만여 개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암매장지역은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인구의 1/4이 줄었다고 합니다.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는 온 나라를 킬링 필드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 지옥 같은 공포는 1975년~1979년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7, 그 후 폴 포트와 캄보디아는
폴포트는 베트남에 밀려 산속으로 들어가 게릴라 전으로 돌입을 하였습니다. 크메르 루주는 중국과 미국의 지원을 몰래 받아 베트남이 설립한 캄보디아 새 정권인 친 베트남과 내전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내전은 1990년대 까지 가게 됩니다. 캄보디아가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도 크메르루주는 굴복하지 내전을 이어가지만 오래된 내전으로 크메르루주 안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1997년 폴 포트는 1997년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자체 인민재판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71세였습니다. 1년 뒤 돌연 사망하였습니다.
쓰레기와 함께 화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크메로 루주는 자연스럽게 해체되었고 이 비극적인 일에 참여한 크메루 루주의 고위 관리자들은 30년후에 재판을 받았지만 거의 고령에 나이가 되어 대부분 사망을 해서 제대로된 처벌은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비극 안에 살아남은 캄보디아인들은 폴 포트 한 사람으로 인해 100년 이상 후퇴 된 삶을 살아가야만 하였습니다.
모든 지식인과 기술자와 예술인들을 사살한 바람에 나라를 교육을 시킬 사람도 나라를 발전시킬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비극은 언제까지 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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