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 말 청나라를 망하는데 큰 역할은 한 중국의 실권자였던 서태후는 지나친 권력과 사치를 누린 여인으로 지금은 중국 3대 악녀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태후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으며 그녀의 사치로 나라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서태후 자금성에 들어가다.
1835년에 태어난 서태후는 당시 황제였던 함풍제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18세에 자금성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서태후는 후궁으로 들어왔지만 황제의 얼굴조차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든 함풍제의 눈에 들려는 노력으로 함풍제의 아들까지 낳게 되었습니다. 함풍제에게는 서태후가 난 아들이 유일한 아들이어서 서태후는 의비로 봉해집니다. 서태후는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 자금성 서쪽에서 사는 태후라는 뜻입니다, 함풍제에게는 서태후 말고 동태후도 있었습니다. 동태후는 서태후와 달리 입궁한 지 몇 달도 안 되어서 태후가 되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이때까지는 서태후는 태후로 봉해지지 못했습니다.
2. 함풍제의 죽음으로 권력이 시작되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연합군이 베이징을 침략하여 자금성을 버리고 열하로 피난을 가게되었습니다, 다음 해 피난지에서 함풍제는 31세 나이로 사망을 하게 됩니다.
함풍제는 유언으로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서태후의 아들이 성인이 될때까지 8명의 대신들이 나라를 보살피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태후는 8 대신의 권력확대를 막기 위해 자금성에서 전쟁을 수습하고 있는 함풍제의 동생은 공친왕과 동태후와 결탁하여 자금성에 도착한 8 대신들을 잡아들여 사살하거나 삭탈관직시킨 신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1881년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는 5살 나이에 황제가 되면서 서태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부터 태후로 올라가 서태후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 달리 글을 읽을 줄 알고 함풍제를 옆에서 도와준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나눠가질 수 없는 서태후는 1884년 공친왕마저도 숙청하여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동태후는 글도 모르고 정치보다는 서태후 아들인 동치제를 보살피는데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3. 서태후 영원한 권력을 위해~
아들인 동치제는 점점 성인의 나이에 가깝게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동치제를 혼인을 시켜 직접 친정을 하기를 원하였지만 서태후는 권력을 아들에게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서태후는 자신이 정한 여인이 아닌 동태후가 추천한 여인을 선택한 동치제에게 분노하여 그들 부부사이를 방해하였습니다.
동치제는 20세의 나이에 천연두로 사망을 하였습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궁밖에서 향락에 빠졌다가 매독에 걸려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동치제의 부인은 1년도 안돼 자살하었습니다.
다음 황제는 서태후의 조카이자 왕족인 4살뿐이 안 되는 광서제를 황제로 올리게 됩니다.
어린 광서제를 앞세워 권력을 계속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권력의 방해가 되는 동태후도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서태후의 권력은 완전 독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서제도 성인이 되면서 직접 친정을 하기 원하였습니다.
서태후는 자금성을 떠나 황실의 정원인 이화원으로 거쳐를 옮기게 됩니다. 그러나 권력을 아직 놓지 않았습니다. 서태후는 뒤에서 모든 일들을 조종하였습니다. 광서제도 서태후에 권력을 맞서기 위해 개혁파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폐위를 시키려고 하지만 외국세력들의 반대로 폐위시키지 못하고 광서제를 자금성안에 감금시켜버립니다. 그리고 황실을 간섭하는 외국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의화단"을 이용해 베이징에 있는 외국인들을 몰살하게 만듭니다. 외국연합국들은 의화단의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베이징으로 침략하고야 맙니다. 서태후는 엄청난 돈을 주는 조건으로 신축조약을 맺고 연합국들을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그 이후 서태후는 외국인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였습니다. 1908년 광서제가 죽자 서태후는 3살 난 선통제인 푸이를 황제로 내서워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태후는 1908년 11월 15일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에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4. 서태후의 화려한 사치는 나라를 휘청거리게 하다
서태후는 27살에 혼자되면서 초라하게 보이면 안 되다면서 피부에 엄청난 신경을 썼습니다. 아침마다 민간요법인 새똥으로 세수를 하고 옥을 갈아서 피부에 발랐으며 젊은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수유가 가능한 어린고 이쁜 여인들의 젖을 직접 빨아먹었다고 합니다. 화려한 머리장식으로 인해 탈모가 시작되면서 궁녀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다가 머리카락이 빠진 것을 보면 즉시 엄청난 화를 내면서 심한 매질을 강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궁녀들은 빠진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 통 넓은 소매가 있는 옷을 입고 빗질을 하였다고 합니다.
서태후가 매일 신는 양말인 자수가 들어간 버선을 한 번만 싣었습니다. 버선만 만드는 비용은 1년의 1만 냥이었습니다. 이 금액은 황실 1년 월급과 같다고 합니다. 버선 하나에고 이렇게 사치스러운데 의상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몇천 벌의 의상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중 300여 개가 달린 진주망토도 유명합니다.
청나라 주로 황실 여인들이 손에 끼는 고깔모양의 호갑투를 금, 은은 물론 귀한 귀금속으로 만들었고 화려한 장식구들 구입하는데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옥을 좋아해서 옥으로 만든 여러 가지 작품들과 장식구들리 많았다고 합니다.
또 황실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을 무리한 복원 하는데 청나라 한해 예산의 10% 이상이 해당되는 금액을 사용하였습니다. 나라가 부유하면 상관이 없겠지만 당시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등에 전쟁 배상금을 갚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청일 전쟁 당시 서태후는 화려한 환갑 연회를 열기 위해 한해 예산 30% 이상을 사용하였습니다. 막대한 금액을 사용하는 바람에 군대정비는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청일전쟁의 패망의 원인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식탐도 유명합니다. 한 끼마다 120여 가지의 음식이 나와야 했습니다. 독살에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음식을 차리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서태후가 매일 먹은 한 끼의 금액은 백성들 5000여 명이 하루 먹을 수 있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죽어서까지 화려하였습니다. 서태후의 장례비용은 전 날에 죽은 광서제에 장례비용의 3배였습니다.
그만큼 그녀의 권력이 컸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장례비용의 대부분은 서태후와 함께 묻힌 비단과 보석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녀의 무덤은 비단과 보석을 훔치기 위해 도벌꾼들에게 파헤쳐지고 맙니다.
5. 서태후의 유언
서태후는 다시는 이 나라에 여인이 정사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태후가 죽은 후 마지막 황제 푸이 끝으로 청나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서태후의 유언은 아무 의미 없는 유언이 된 것입니다.
보살피고 베풀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욕구와 욕심을 끝없이 체우는 바람에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다 못해 뽑히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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