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의 천막을 용봉차일이라고 합니다. 용과 봉화이 그려져 있는 천막으로 나라의 중요한 잔치가 있을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천막때문에 권력이 무너지는 두 가지 사건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1. 한명회의 압구정 사건
한명회는 세조를 왕으로 올리는데 일등공신이며 영의정에 올랐으며 예종과 성종의 장인어른으로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세조, 예종이 죽은 후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성종대 까지 한명회의 권세는 시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한명회의 나이도 60세가 넘어가고 성종 또한 자신보다 높은 한명회의 권세가 못마땅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당시 성종이 20세 되어 수렴청정을 거두고 직접 친정을 하려고 선언하였는데 한명회가 아직 성종이 친정을 하기에는 이르다며 반대를 하였습니다. 성종은 이로 이해 마음이 상해쓰며 조정대신들도 한명회의 태도는 왕을 능멸하는 건방진 태도라면서 공격하였습니다. 새로운의 권세인 성종의 눈에 들기 위한 조정대신들의 행동이었습니다.
한명회는 문제가 커지자 조용히 관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한강 근처에 노년을 지내기 위해 정자하나를 세웠는데. 한명회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압구정의 지명유래이기도 합니다.
이 압구정의 경치가 너무 좋아 명나라 사람들에게 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조선에 찾아오기로 한 명나라 사신들은 압구정을 보고 기를 원하였고 한명회는 친분이 두터운 사신들을 위해 압구정에서 연회를 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명회는 성종에게 사신을 모시기에 정자가 협소하여 정자 앞에 천막을 쳐야 한다며 왕만이 쓸 수 있는 천막 (용봉차일)을 빌려 달라고 청 하였습니다,
한명회는 왕의 상징인 용과 봉이 그려진 비단천막으로 자신의 권세가 아직도 높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종은 한명회의 속셈을 바로 알고서는 크게 화를 냈으며 압구정에서 베풀 연회를 취소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사신들의 연회는 궁궐 안에서 베풀 테니 한명회 보고 참석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한명회는 부인 아프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지켜본 대신들은 한명회의 행동이 불신하다는 이유로 탄핵 상소들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성종은 못 이긴척하면서 한명회의 직위를 회수해 버립니다.
이 사건으로 한명회의 그나마 유지하고 있었던 권세는 완전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2. 숙종 때 유악 남용사건으로 경신환국이 일어나다.
숙종은 조선의 19대 왕으로 14세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수렴청정 없이 바로 친정을 합니다. 숙종은 14세인데도 불구하고 나이 많은 대신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만큼 왕의 권위가 몸에 베인 왕이었습니다.
숙종 때는 서인과 남인으로 당파가 나뉘어져 있었는데 숙종 초기에는 남인이 세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숙종 6년 남인의 대표급인 영의정 허적에게 숙종은 궤장을 하사 합니다, 궤장이란 공이 많은 70세 넘은 신하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입니다. 신하 입장에서는 최고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허적의 조부인 허점에게 시호까지 내렸습니다.
남인 허적에게는 완전 가문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허적은 이 경사스러운 날을 축하하기 위해 집에서 크게 잔치를 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잔칫날에 비가 많이 내리게 되었습니다.
숙종이 허적의 잔치가 걱정이 되어 기름으로 방수 처리가 되어있는 천막 "유악"을 갖다 주라고 신하에게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명을 받은 신하에게 돌아 대답은 허적이 벌써 유악을 챙겨 갔다는 것입니다.
유악은 왕의 전용 천막으로 왕의 허락 없이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숙종은 허적의 오만한 태도에 크게 분노하게 됩니다. 숙종의 성격에 자신을 우습게 아는 남인들을 그냥 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숙종은 남인들이 지휘하고 있던 군권들을 모두 서인 출신으로 교체해버립니다.
숙종이 남인들을 견제하고 있음을 눈치체 서인들은 숙종에게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인조의 손자 복선군과 같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상소문을 올리게 됩니다.
숙종은 이 상소문을 명분으로 삼아 남인인 허적, 윤후, 이원정 등 수장들이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역모의 사건의 주역인 허견과 복선군은 물론 그의 형제인 복창군, 복평군도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이 역모 사건으로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어가는 경신환국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 유악 남용사건을 조선 실록에 기록에는 없고 연려실기술에 쓰인 야사로 내려오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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