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왕이 오르는데 도움을 주었고 광해군의 총애로 권력을 휘둘렀으며 광해군을 왕의 자리에서 쫓아내는데 도움을 주었던 어느 한 궁녀의 이야기입니다.
1. 궁녀에서 상궁으로
김개시는 언제 태어나고 어디 출신의 사람인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의 이름을 통해 천민 출신이라고 추측을 할 뿐입니다. 김개시에서 시(屎)는 한자로 똥시입니다.
즉 한글로 풀어보면 이름이 김 개똥이라는 것입니다. 양반이나 양민 출신의 사람들에게는 잘 쓰이지 않는 이름으로 아마 천민 출신으로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10대 초반에 궁녀로 들어 온 것으로 추측이대고 김개시는 다른 궁녀와 다르게 문자를 잘 만큼 총명한 궁녀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일한 곳은 광해군의 처소였습니다.
광해군이 어린나이 어머니 공빈김 씨가 죽자 김개시는 궁녀로서 광해군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592년 조선의 임지왜란이 터지는데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을 치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선조의 파천길에 김개시도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광해군의 궁녀였지만 상황이 비상시국이어서 김개시도 파천길 인원으로 갑자기 발탁되어 선조와 동행길에 오르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이 임지왜란이란 열악한 상황에서 눈치 빠르고 글을 잘아는 김개시의 명석함이 선조의 눈에 들어 전쟁 중에 정 5품에 특별상궁으로 단숨에 승진하게 됩니다.
김개시의 영특함으로 일개 궁녀에서 왕을 옆에서 모시는 특별상궁으로 바로 올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김개시가 전에 모셨던 광해군은 임지왜란으로 세자가 되었습니다.
2.김개시는 위태로운 광해군을 도와주다.
당시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선조는 왕비의 아들인 적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싶어 했습니다. 아직 왕비에게 아들이 없어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갑자기 임진왜란 터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후궁아들 중에서 가장 총명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입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시 도망간 선조를 대신에 나라의 민심을 잘 다스려 백성의 친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백성의 친송을 받는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생각을 하면서 대 놓고 외면합니다.
거기에 선조의 첫 번째 부인인 의인왕후가 전쟁 시 사망하게 되자 선조는 간택을 통해 인목왕후를 계비로 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인목왕후는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의 세자자리는 갈 수록 위태로워지고 있었습니다. 대신들도 영창대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광해군 편에 있어준 사람은 선조의 상궁 김개시였습니다.
항상 선조 옆에 있는 김개시 상궁은 광해군의 편이 되어 선조에게 애기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김개시가 광해군의 편을 들었던 이유는 선조의 건강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선조가 얼마 못 살 수 있다는 판단이 되어 광해군으로 환승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원래 궁녀와 상궁은 자신이 모시는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상례를 치른 뒤 출궁을 해야 했습니다, 김 개시은 출궁으로 자식의 욕망을 끝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조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가 되어 어쩔 수 없이 광해군에게 왕을 승계하고 세상를 떠나게 됩니다.
건강은 안 좋았지만 갑자스러운 선조의 죽음으로 선조의 암살설이 떠돌았는데 범인은 김개시라는 소문이었습니다. 정확한 증거나 사료 및 기록이 없어 그냥 암살설로만 남아있습니다.
그만큼 김개시가 광해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애기가 아닐까요~
항상 세자자리가 위태로웠던 광해군은 선조이어 1608년 15대 조선의 왕으로 즉위합니다.
3. 광해군을 등에 업고 최고의 권력자가 된 김개시
조선실록에 김개시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 김개시는 성인이 되어서도 용모가 꽃피지 못하였다"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녀는 외모는 그리 아름답지는 않아나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는 것은 그녀가 나름 판단이 빠르고 명석했다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그런 좋은 머리를 가진 김개시는 사리사욕에 이용하였습니다.
광해군은 왕이 되어서도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나라를 돌보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613년 조선의 서얼들이 적자, 서자 차별을 폐지해달는 상소를 올렸지만 거부당하자 분노하여 도둑질을 하며 악행을 저지르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체포가 되었는데 그들은 김제남과 손을 잡고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허위 자백을 하게 됩니다.
이 자백으로 영창대군의 편에 있었던 류경영, 김제남 등은 죽음을 당하였고 여러 대신들도 관직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이 사건이 계축옥사입니다.
영차대군 또한 귀향을 가 죽음을 당합니다. 또 영창대군의 어머니이자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 또한 폐위되어 서궁에 갇혀버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김개시는 당시 권력을 장악한 이이첨과 함께 계축옥사 일에 깊게 개입해 자신의 권력을 누리는데 걸림돌 있었던 반대파들을 모두 없애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마음적으로 더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김개시를 후궁으로 들이여하였지만 김개시는 상궁으로 남기를 원하였습니다.
후궁이 되면 궁 밖을 자유롭게 드나들기가 힘들기 때문에 자신의 권세를 제대로 누릴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녀는 이이첨과 함께 매관매직을 일삼고 조정에 깊숙이 개입하여 권력과 부를 제대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광해군의 침소에 후궁들을 지명하는 위치에 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상궁의 지위에서 후궁들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른 여인이 되었습니다.
4. 어리석은 배신
광해군은 창덕궁, 경희궁을 재건하거나 중건하는데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안정되어있지 않는 상태에서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나라 재정에 큰 부담이었습니다.
공사 현장에 끌려가 일하는 백성들의 원성도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충성하지 않는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특히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명분으로 조종대신들에게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상소문에서도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김개시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광해군을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반정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김개시는 광해군의 눈과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설마 똑똑하고 눈치가 9단이 김개시가 반정의 조짐을 몰랐을까요~
그녀는 광해군을 포기하고 새로운 세력이 되는 김자점과 결탁하여 반정을 도왔던 것입니다.
결국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강제로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권력을 환승하려고 한 김개시는 광해군을 쫓아 내는데 성공을 하였으나 권력 환승에는 실패하였습니다.
김자점은 김개시를 요사스러운 여자로 몰아 반군세력에 의해 참수형으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무슨 이유로 광해군을 배신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김개시는 반정에 성공한 세력들이 일개 상궁과 권력을 나눠 가질 거라는 착각을 할 만큼 어리석어진 것일까요~
그 영특한 머리로 광해군을 도와 백성을 돌보았으면 오늘날 그녀의 평가는 상반대 기록으로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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