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한 후 수월하게 1393년에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 입장에서 정몽주가 필요하였는데 이방원이 죽게 하였으니 이성계는 그 후 아들 이방원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남 보다 못한 관계가 되어버린 이성계와 이방원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이방원은 이성계의 자랑이었다
이방원은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여 이성계와 그의 두번째 부인까지 이뻐하였습니다. 무신 집안에서 처음으로 17세 어린 나이에 과거시험에 급제를 하여 집안에 처음으로 문신으로 출세 길에 오른 아들이 이성계에게 자랑이었으며 가문의 영광이었습니다.
나라의 건국을 계획을 하였을때도 이성계에게 있어 이방원은 큰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이방원이 스승인 정몽주를 살해한 후는 이방원을 멀리 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성계는 조선의 왕으로 오르자 왕자가 된 아들들에게 각자 맞는 직위를 내리지만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방원은 변두리에 있는 동북면에서 조사제사를 맡으라는 명을 내리게 됩니다.
새로운 조선이 세워지자 이성계의 정치적 동반자인 정도전과 어려을 때 부터 이뻐해 주신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강씨그리고 이성계 등 이들은 이방원을 경계대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성계는 자신의 뜻과 달리 가는 아들이 싫었고, 강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다음 왕으로 만들고 싶었고, 정도전은 자신의 권력유지에는 이방원보다 어린 강씨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판단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방원은 하루 아침에 믿고 의지한 사람들이 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2. 이방원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다.
이성계는 두번째 부인 강씨와 정도전의 조언에 따라 첫째 부인인 한씨 사이에서 난 이방원을 포함한 다섯 아들들을 배제시키고 이성계의 7번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당시 방석의 나이 11세였습니다.
이방석은 강씨의 차남으로 형 방번을 재치고 세자가 된 것입니다. 그가 세자가 된 이유는 단 하나 나이가 가장 어려서입니다. 정도전은 어린 방석을 왕의 교육을 제대로 시켜서 진정한 왕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씨는 자신의 아들 중 아무나 세자가 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원의 입장에서 고생의 자신과 형들이 다 했는데 가장 어린 동생녀석이 세자가 되었으니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정도전과 강씨의 뜻대로 세상을 돌아가는가 싶었는데 강씨가 그만 병이 깊어져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정도전은 이방원과 그들형제를 견제 하기의해 사병혁파를 실행하는데 사병혁파란 개인적으로 병사를 키워서는 안되고 무기를 소장해서도 안 되는 제도입니다. 정도전에 견제가 심해질수록 이방원과 그의 형제들은 불만이 점점 더 쌓이게 됩니다. 결국 1398년 이방원 중심으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이 난으로 이방원은 정도전과 이복동생인 방번과 방석은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또한 아버지 이성계는 상왕으로 물러나게 하고 둘째 형인 이 방과를 왕을 올리게 됩니다. 이분이 조선왕 2대 정종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세자가 되어 다음 후계를 기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후 1400년 이방원은 드디어 조선의 제3대 왕으로 오르게 됩니다.
3. 이성계 전국을 돌아다니다.
이방원이 왕이 되므로 그의 형인 정종은 상왕이 되고 아버지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어 버립니다. 태상왕이 된 이성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방원에 권력의 힘으로 밀려나버린 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꼈던 정도전과 후계자로 삼았던 아들을 죽인 사람도 이방원이었습니다.
한때는 이뻐하였던 아들이었으나 지금은 원망과 미움이 가장큰 아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성계는 60세 후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이방원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싫어 개경을 떠나 전국으로 돌아다니게 됩니다.
이성계는 마음이 무거워서 그런지 소요산, 금강산, 오대산 등 주로 사찰을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고령인 이성계가 궁 밖을 떠나 돌아다니니 왕이 된 이방원 입장에서는 백성들 보기 민망하였습니다.
효를 중요시 여기라고 백성들에게 널리 애기하는데 본인은 아버지의 미움을 받고 떠돌이 신세로 만들었으니 백성들 볼 낯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싶은 욕심이 있지 않았을 까요~
이성계가 함흥에 있을때 이방원 궁을 돌아와 달라고 사신을 보내면 이성계는 사신을 죽여 답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유래된 고사성어가 함흥차사입니다 지금은 심부름하러 가서 오지 않거나 늦게 온 사람의 의미로 쓰입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만큼 이성계의 화가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는 뜻일 겁니다.
4. 조사의의 난의 배후는?
조사의의난은 1402년 안변부사 조사의가 조선의 북쪽 동북면에서 일으킨 난입니다.
군사의 규모는 1만여 명으로 꽤 많은 군사들이 모여진 반란군이었습니다. 그들의 명분은 신덕왕후강 씨의 원수를 갚게 다는 것입니다. 즉 이방원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다는 역모였습니다.
그런데 북쪽인 동부면은 오히려 이방원의 어머니 한씨가 살았던 곳이고 강 씨인 신덕왕후는 개경 출신이었습니다. 즉 신덕왕후는 동부면과 그다지 연관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조사의 의 난이 일어날 시기에 이성계도 동북면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을 처벌하기 위해 조사의를 앞세워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실 이성계가 동북면에서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은 이방원도 알고는 있었습니다.
이방원은 조사사의 난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 동북면으로 가 직접 진두지휘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이 되어버린 난입니다. 아마 이방원은 조사사의 난을 혈전 없이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의 부대에 포로가 들어가 4만 명이 넘은 군사들이 진압하러 온다는 정보를 내부에 퍼트리게 됩니다. 압도적인 군사들이 동원되어 올라온다는 정보에 군사들은 겁을 먹고는 이탈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연스럽게 조사의의 군대는 약해져서 이방원에게 직압 되고 맙니다. 역모를 일으킨 조사위는 조용히 처형됩니다.
조사의 난 실패 이후 이성계는 이방원의 뜻대로 다시 환궁을 하게 됩니다.
이방원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버지를 환궁길을 기쁨마음으로 맞이했으며 궁 안에 불편함이 없도록 크게 신경 썼습니다. 그 후 이성계는 궁 안에서 조용히 살았습니다.
1408년 72세의 나이로 이성계는 자신이 가장 미워하였던 아들 옆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죽는 날까지 효를 다하였다고 합니다.
이방원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도 컸지만 누구보다 아버지에게 사랑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많았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방원이란 인물은 여러 사람들과 애증의 관계가 참 많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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