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은 국민이 나라의 주권자라고 제대로 항명하고 국민이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경험을 했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1. 혁명의 시작은 3.15 부정선고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 부통령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정부의 노골적인 부정선거와 부정투표를 하는 것을 보고 시민들은 분노하였습니다. 당시 이승만은 자유당으로 제1대 2대 3대까지 연임으로 대통령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제4대에도 출마를 하였습니다. 이승만은 경제 후보인 민주당의 조병욱이 갑자스러운 병사로 단일 후보가 되어 대통령이 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대통령의 자유당의 후보인 이기붕이 상황이 달랐습니다. 이기붕은 지지율은 좋지 않아서 민주당에게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이승만의 나이가 86세로 재임기간에 얼마든지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자유당는 이승만 사망 시 정권을 유지하려면 이기붕이 부대통령이 꼭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부정선거 유세를 항의하기 위해 2월 28일에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교를 정치도구화 한다고 자유당을 비판하여 거리로 나온 사건도 있었습니다.
부정투표로는 4할 사전 투표로 투표도 하기전에 40% 로가 확정된 것이고 3인조 5인조의 가서 서로 자유당을 찍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투표소에는 자유당 완자를 하는 사람들을 풀어 공포 분위기 안에서 투표를 하게 하였고 또 투표장에 야당 참관자들은 모두 축출하여 감시조차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투표함 바꿔치기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승만과 이기붕은 높은 가짜 지지율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3월 15일 투표부정을 반발하는 대규모 시위가 마산에서 일어나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유혈사태가 일어납니다.
2.사라진 김주열학생
3월 15일 자유당 정권에 부정투표에 대한 시민과 학생의 반발이 심해지자 경찰력을 동원합니다.
이때 경찰은 군인용 최루탄을 이용해 시민들을 강제 해산 시켰으며 유혈사태도 일어났습니다.
마산에서 시위도중에 실종된 김주열은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서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남원 출신으로 마산의 명문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려고 온 학생이었는데 시험을 본 후 그도 시위에 참석한 것입니다.
경찰은 김주열이 사망한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의 시신의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되다는 것을 알고 바닷가에 시체를 유기하였던 것입니다. 김주열의 시신은 한 달 가까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시신의 훼손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말입니다. 김주열은 마산 명문고등학교에도 합격을 했지만 그는 입학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김주열의 시신을 보고 분노하였고 이로 인해 잠시 잠잠했던 시위는 불 타 올라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3. 정치 깡패개입
4월 18일 서울 고대생 1천여 명이 국회의사당에 몰려가 시위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신입생 환영회위장하여 거리로 몰려 나갔다고 합니다.
그들은 부정선거 다시 할 것과 김주열 죽인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시위였습니다.
이 시위는 경찰들의 개입도 없이 평화롭게 끝날 줄 알았는데 해산 이후 일부 고대생들이 종로 청일 백화점 앞에서 깡패의 습격을 받게 됩니다. 깡패들은 머리에 두른 고대라는 글자가 새겨진 수건과 당시 대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다녀서 고대생들을 금방 구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대생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무차별 폭력을 당하였습니다. 2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정치깡패는 경찰들이 꺼려했던 것들을 폭력적으로 행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뒤에는 항사 정부가 있었습니다
4. 4월 19일 혁명 일어나다
고대생 피습사건으로 대광고등학 학생들이 제일 먼저 시위가 시작되었고 서울대학교 학생들과 합류가 되면서 서울 곳곳에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날이 4.19이라고도 하지만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은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가 시위를 하였고 다음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도 시위를 하였습니다.
정부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고 깡패도 동원했으며 나중에는 계엄령까지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군부대가 들어옴으로써 시위대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날 경찰들로 인해 사망자 수는 120여 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군인들은 진입을 하였지만 시위대와 대립은 없었습니다.
5.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
계엄령 시행으로 시위는 소각사태로 가고 있었지만
4월 25일 대학교수 257명이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하였습니다. 젊은 학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면 안 되다는 스승의 마음으로 계엄령을 위반하면서 까지 거리로 나온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성을 갖고 있는 교수들이 가두시위는 군사들 마저도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교수들의 시위 뒤에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따르기 시작하였고 그 인원수는 1만여 명에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10만 명이 시위에 동참하였고 이제는 이승만 하야를 외쳤습니다. 자유당과 이승만은 정권에서 물러나야햔다는 것입니다.
6. 이승만 드디어 물러나다.
계엄령까지 선포되었는데 국민들의 시위대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경무대(지금의 청화대)에 있던 이승만은 그제야 상태파악을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계엄령 사령관이 시위대 사람들에게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자고 하여 정말로 사령관 주선으로 시위대 대표로 뽑힌 시민 5명과 이승만 대통령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대표시민들은 이승만에게 하야를 요구하였고 이승만은 하야 요구에 충격을 받았지만 하야를 하기로 약속합니다
이로써 4.19 혁명은 국민의 힘으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이승만이 이 모든 일들을 주도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사람들이 끔찍한 만행으로 국민들이 희생을 당한 것에 대한 책임은 벗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며칠 뒤 4.19 혁명에 원흉이었던 이기붕은 가족과 함께 자살하였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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