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항쟁의 거리로 나온 넥타이 부대, 침묵에서 외침으로
본문 바로가기
근대사

6월 항쟁의 거리로 나온 넥타이 부대, 침묵에서 외침으로

by 5914 2025. 6. 10.
반응형

 

 

1987년 6월 10일, 서울의 중심 종로 거리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조용히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화염병도, 깃발도, 구호도 없이 등장했습니다.
대신 그들의 손에는 서류가방이 있었고, 목에는 단정한 넥타이가 걸려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퇴근하자마자 넥타이를 매단 채 걸어 나왔고,
누군가는 점심시간을 빌려 동료들과 짧은 거리 응원을 마친 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1987년 6월 항쟁의 조용하지만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
바로 ‘넥타이 부대’였습니다.

1. 시작은 참담함이었다 - 박종철, 그리고 분노로 번진 그날의 진실

항쟁의 불씨는 1987년 1월 14일, 한 젊은이의 죽음에서 시작됐습니다.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박종철 열사는 경찰의 고문 끝에 사망했습니다.
처음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둘러댔지만, 그 거짓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넥타이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정치에는 관심 없다”, “시위는 학생들이나 하는 것”, “우리는 일해야 한다”는 말들이
그들의 마음속을 채우고 있었죠.

하지만 6월 9일, 연세대학교 앞에서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피를 흘리며 들것에 실려가는 그의 사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2.노태우 지명 발표, 분노를 점화하다

1987년 6월 10일 아침,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바로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를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한 것입니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가 정권의 후계자로 지명되자,
국민들은 이 결정을 사실상 ‘전두환 2기 체제’의 선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랫동안 직선제를 요구해 온 국민을 무시하고,
또다시 군부 출신 인사를 내세운 이 발표는
6월 10일 오후에 예정되어 있던 전국 동시 시위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날 거리에는 이전과는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3. “호헌 철폐” – 거리에서 외쳐진 정치적 양심

“호헌 철폐”라는 구호는 단순히 헌법을 고치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유지하려던 **간접선거 헌법(호헌)**을
‘불의한 체제’로 규정하고 폐기하라는 요구였죠.

이 구호는 특히 대학생, 지식인, 시민단체, 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외쳐졌지만,
곧 넥타이 부대와 일반 시민들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적 용어에 익숙하지 않던 사람들도
이제는 거리에서 양복 차림으로 “호헌 철폐!”를 외쳤고,
구호는 점점 거리 전체의 울림이 되어 갔습니다.

4. “넥타이는 옷이 아니라 울림이었다”

넥타이 부대는 누구였을까요?

대부분은 회사원, 공무원, 은행원, 기자, 교사와 같은 중산층 직장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침 9시에 출근하고, 가정을 책임지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시위에 참여한다는 건, 단순한 외침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시위를 부정적으로 봤습니다.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데모나 하고…”
하지만 동시에 속으로는
“맞는 말이긴 하지,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해…”
하고 마음속으로는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또 누군가는

“난 일만 열심히 하자.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온 것도 경제 발전 덕분이잖아.”
라며 거리두기를 시도했지만, 이한열의 사진 앞에서 결국 눈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거리로 나온 날”

6월 10일, 넥타이 부대는 처음 등장했습니다.

퇴근길 정장을 입은 시민들이 종로, 명동, 시청 앞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학생들 사이에 섞여 있었고,
최루탄이 터지자 물수건을 내주고, 학생들을 뒤로 숨겼습니다.

어떤 이는 아예 구두를 벗고 도망치는 학생을 위해 건물 안으로 이끌었고,
어떤 이는 경찰에 연행당하는 학생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연락처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정치와 거리두던 그들이, 이제는 거리에서 역사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4. “침묵하는 다수가 깨어나다”

6월 18일, 6월 26일 시위로 이어질수록, 넥타이 부대의 존재는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 고층 건물에서 휴지가 던져졌습니다.
    최루탄에 쩔은 거리 위로, 창문이 열리고 두루마리 휴지가 내려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시위대에 대한 침묵하는 연대의 끈이었습니다.
  • 버스 안 시민들은 손수건을 흔들었습니다.
    차량 안에서 시위대를 바라보던 시민들이 창문을 열고 흰 손수건을 흔들며 응원했습니다.
  • 자동차는 경적을 울렸습니다.
    도로를 막고 지나가는 시위대를 향해, 경적 소리는 짜증이 아니라 응원의 신호가 되었습니다.

이제 민주주의를 외치는 목소리는 학생들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넥타이 부대와 시민들은 **‘너희만 싸우게 두지 않겠다’**는 뜻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최루탄이 터지자 물수건을 내주고, 학생들을 뒤로 숨겼습니다.

어떤 이는 아예 구두를 벗고 도망치는 학생을 위해 건물 안으로 이끌었고,
어떤 이는 경찰에 연행당하는 학생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연락처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정치와 거리두던 그들이, 이제는 거리에서 역사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6.29 선언’을 발표

5.“그러나 노태우”

항쟁 이후의 선거, 그리고 아쉬움

6월 항쟁은 결국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습니다.
6월 29일, 노태우는 항쟁의 결과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며

  • 대통령 직선제 수용
  • 정치범 석방
  • 언론 자유 확대
  • 야당 정치 활동 보장
    등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노태우가 당선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피를 흘리며 얻어낸 선거인데, 왜 또 군부 인물이 뽑힌 거지?”

그 이유는 복잡했습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하지 못했고, 표는 분산되었으며,
보수 언론은 여전히 노태우에게 유리한 보도를 했고,
막 태어난 민주주의는 아직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6. “하지만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결국 그날 거리로 나선 사람들,
그중에서도 넥타이를 매고 나온 그이 합류하였기에 아니 모든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원했기에  대한민국은 변했습니다.

  • 우리는 대통령을 직접 뽑게 되었고,
  • 언론은 조금씩 자유를 되찾았으며,
  • 시민사회는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넥타이 부대는 단지 항쟁의 순간만이 아니라,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지탱자가 되었습니다.

7.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넥타이 부대는 "시위에 나선 직장인들"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결국 행동을 선택한 시민이었습니다.
그들의 조용한 걸음과 작은 외침은,
대한민국이 침묵에서 자유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