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이름이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는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인도를 향한 항해를 시작했고, 그의 여정은 오랫동안 “신대륙 발견”이라는 문장으로 기억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그를 ‘발견자’가 아닌 침입자이자 학살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바뀌게 된 걸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 변화 속에서 무엇을 봐야 할까요?
1. “인도를 향한 항해”라는 착각
콜럼버스는 원래 인도로 가고자 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아시아의 향신료, 금, 비단에 대한 욕망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죠. 하지만 육로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차단되었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항로를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이때 새로운 생각을 제안합니다. “지구가 둥글다면, 서쪽으로 가면 인도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다.” 그는 지구의 크기를 심각하게 과소평가했고,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왕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1492년 8월, 산타 마리아호와 두 척의 배는 서쪽 바다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2. 그가 도달한 곳은 ‘인도’가 아니었습니다
두 달 반이 지난 후, 콜럼버스는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도착합니다. 그는 이 섬을 산살바도르라고 이름 붙였고, 자신이 인도의 외곽 섬에 도달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명칭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인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 이미 수천 년 동안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존재해 온 아메리카 대륙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3. 기대와는 달리, 아메리카에는 금도 향신료도 없었습니다
콜럼버스가 찾은 곳에는 금도 향신료도 많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곳에는 따뜻한 기후, 생소한 작물들, 그리고 유럽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금이 더 안쪽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원주민들에게 금이 어디서 나는지를 말하라며 고문하거나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일부 마을에서 얻은 소량의 금 장신구를 들고 귀국하여,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금이 무한히 나올 것이다”라고 보고했고, 그 말은 더 많은 탐험과 정복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4.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자행된 만행들
콜럼버스와 그 뒤를 이은 유럽 탐험가들이 아메리카에서 벌인 일들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문명화’라는 말과는 너무도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히스파니올라 섬(오늘날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원주민들에게 강제로 금을 캐게 했고, 채굴량을 채우지 못한 이들에게는 손목을 자르거나 처형하는 방식으로 다스렸습니다.
원주민 여성과 아이들은 성노예로 팔려 나갔으며, 무력 저항은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은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 사회를 휩쓸었고, 콜럼버스가 도착한 이후 100년 사이에 원주민 인구의 90%가 사라졌습니다.
5. 그의 쓸쓸한 종말
콜럼버스는 처음에는 스페인 왕실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지만, 식민지에서의 폭정과 부패, 탐험가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 총독 직위에서 해임되고, 쇠사슬에 묶여 스페인으로 송환됩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이 인도에 도달했다고 믿었고, 자신이 만든 식민지가 위대하다고 확신했지만, 1506년, 세비야 근처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 디에고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소송을 벌였고, 일부 권리는 되찾았지만, 그의 생애는 이미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습니다.
6. 그럼에도 그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 미국의 정치적 필요
콜럼버스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입니다. 18세기 말~19세기 초, 미국이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왕조도, 긴 역사도 없는 신생 국가였습니다. 따라서 스스로의 탄생을 정당화해줄 ‘건국 신화’가 필요했지요.
콜럼버스는 그 목적에 딱 맞는 인물이었습니다.
- 유럽의 귀족이 아닌 개척자
-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넌 모험가
- ‘신대륙’을 발견한 역사적 기점
이후 미국은 그의 이름을 딴 수도명을 만들고, 기념일을 제정하고, 그를 국가 정체성의 시작점으로 삼게 됩니다.
7. 이제는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 콜럼버스는 정말 영웅이었을까요?
오늘날 미국은 예전과는 다릅니다. 원주민, 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이민자 등 다양한 공동체가 공존하며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는 백인 중심의 이야기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말은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의 존재를 지우는 표현이며, 그 아래에서 벌어진 폭력과 학살의 역사는 이제 드러나야 할 진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도시에서는 ‘콜럼버스의 날’을 폐지하고, ‘원주민의 날(Indigenous Peoples’ Day)’로 대체하고 있으며, 동상은 철거를 추진하고, 교과서와 역사 교육도 바뀌고 있습니다.
지금의 콜럼버스는 위대한 탐험가가 아니라, 권력자가 만들어낸 신화였음을 사실화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한 원주민들에 대한 추모하고 애도하는 분위기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어쩜 이젠 미국은 콜롬버스같은 영웅이 없어도 그들만의 역사가 뿌리가 내려지기 시작했기때문에 콜롬버스의 역할은 끝나가고 있는 것 아닐까요~
가끔은 역사는 정치적 사회적 필요에 따라 역사의 인물들을 사실과 상관없이 영웅을 만들기도 하고 악마를 만들기도 하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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