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은 공민왕의 총애의 힘을 받아 부패한 고려를 개혁을 시도하였던 고려의 승려였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그들의 권익을 챙겨주고 싶어지만 신돈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럼 신돈은 어떻게 공민왕의 총애를 받고 무엇을 하였는지 그리고 왜 요승이로 기록이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천한 노비의 아들이 절에서 태어나다.
신돈은 1300년대 초 고려의 계성현에 옥천사라는 절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누구인지 기록에는 없으나 어머니는 옥천사의 노비출신이었습니다. 신분의 계승으로 신돈도 노비출신이었습니다.
신돈은 어려을 때부터 총명하고 언어구사에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총명하다고 해도 노비출신이 승려가 될 수는 없는 당시 현실에서 신돈은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승려가 되었는지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신돈은 노비 출신이라는 이유로 동료 승려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였습니다. 당시 고려는 불교국가로 승려는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 좋은 집안이나 왕가의 자손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신돈이 따돌림당하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지도 모릅니다.. 신돈의 법명은 편조(遍照)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널리 비추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승려가 되었어도 그의 삶은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신돈은 매골승이라 하여 죽은 사람의 시신을 수습과 매장하고 넋을 기리는 일을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다니면서 하였습니다. 당시 고려는 외부칩입과 홍건적의 난으로 길 위에 수습이 안된 시신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신돈은 떠돌면서 권문세족들이 권력을 이용해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고 노비를 만들어 버리는 행포들로 백성들이 처참한 삶들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2. 공민왕과 만남에서 헤어짐까지
신돈이 승려로 있을때 고려의 왕은 공민왕이었습니다. 공민왕은 우연곡절 끝에 왕이 되어 권문세력으로 부패되어 망국으로 들어선 고려를 개혁을 하고 싶어 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처럼 개혁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권문세력들의 대부분은 고려를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을 하는 원나라의 비호를 받아 권문세력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였습니다. 또 신규세력을 만들어 개혁을 추진한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개혁을 하는 것이지 백성과 왕을 위해 개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민왕은 고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신돈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공민왕과 신돈의 만남의 일화에서는 공민왕이 어느 날 꿈속에서 공민왕을 죽이려는 자객들이 침소까지 들어와 공격을 하여 목숨 위태로운 지경까지 갔는데 갑자기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가 공민왕을 살려주고 사라지는 악몽을 꾸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공민왕의 측근인 이원명이 신돈을 공민왕에게 알현시켰는데 꿈속에서 공민왕을 구해준 남자가 신돈과 똑같이 닮아다는 이유로 신돈에게 큰 호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신돈을 몇 번 더 만나면서 공민왕은 신돈의 능숙한 말솜씨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신돈을 가까이하는 공민왕을 보고 권문세력들 반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공민왕은 할 수없이 신돈을 멀리 하였고 신돈은 다시 떠돌이 승려가 되어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3. 공민왕 신돈에게 부탁하다.
공민왕은 신돈과 헤어진 후 1359년 원나라에 일어난 홍건적의 난이 고려의 까지 공격하여 최영과 이성계 등의 무신세력들이 맹렬하게 직압을 하였습니다. 1차, 2차에 거쳐서 일어난 난을 진압하면서 무신의 세력은 점점 커져가고 있어으며 또 1365년에는 공민왕이 믿고 의지하였던 부인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노국공주는 원나라의 공주이므로 원나라의 정치적 공격을 그녀를 통해 막아낼 수 있었는데 그런 방패막이 없어진 것입니다. 무엇보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빈자리를 몹시 견디기 힘들어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시간이 갈수록 부패가 심해지는 권문세력 홍거적 난의 진압 이후 세력이 커져가는 무인들 원나라의 명으로 왕위에서 쫓겨 날 수도 있는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공민왕은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였습니다.
주변에는 정치적인 인연이 없고 총명한 사람으로 자신의 개혁추진을 대신해줄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공민왕이 생각한 사람이 승려 신돈이었습니다. 그래서 떠돌고 있던 신돈을 찾아 궁으로 다시 불러들이게 됩니다.
궁을 찾아낸 공민왕은 왕의 스승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한마디로 공민왕의 옆에서 정치적인 자문의 역할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 신돈은 갑자스런 운 제안이기 했지만 수락을 하게 됩니다. 공민왕은 그 후 신돈에게 주요 관직들을 내려주면서 신돈의 권위가 점점 커져가게 만들었습니다. 주요관직들을 맞게 된 신돈은 거절의사를 표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은 신돈에게 부탁을 하는데 결국 신돈은 공민왕에게 자신의 안전과 배신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요구하게 됩니다. "절대 다른 사람의 말에 현혹되지 않을 것을 부처와 하늘 앞에 맹세하노라"는 내용의 각서를 공민왕은 신돈에게 작성해 주면서 신돈은 공민왕을 대신해 망해가는 고려의 개혁을 시작하게 됩니다.

4, 개혁의 시작
신돈은 매골승이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무엇으로 힘들어하며 아파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백성들의 땅을 뺏고 노비로 만드는 권문세족들을 처단하기 위해 1366년 전민변정도감이라는 임시 관청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에는 권세가의 불법 토지 소유와 농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 관청이었습니다. 빼앗긴 토지와 신분을 찾기 위해 백성들은 모여들었고 신돈은 직접 판결하여 백성들의 원통함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신돈은 백성들의 찬사를 받아 미륵불이 내려오셨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신돈의 행보를 반발한 권문세족들과 최영을 포함해 무신세력들도 죄목들을 만들어 처벌을 하거나 귀향을 보내었습니다. 공민왕이 두려워하는 권세가들을 신돈이 약한 시켜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해 개혁을 뒤받침 할 신진세력을 모으기 위해 1367년 성균관 중수를 착수하였습니다. 신돈은 성균관을 통해 배출된 새로운 인제들로 개혁추진 세력으로 만들 계획이었습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 과거시험의 합격자를 왕이 직접 뽑게 하였습니다. 왕의 세력확장의 수다이때 성균관에서 배출된 인제들 중에 고려의 대학자인 이색, 고려의 충신 정몽주, 조선의 기틀을 다진 정도전이 등으로 신진세력을 만들었지만 신돈의 개혁은 6년 만에 실패로 돌아갑니다.
5. 신돈은 역적이 되어 죽다.
공민왕은 신돈이 개혁을 추진하는 동안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만 갔으면 노국공주의 영전과 이전 보수로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신돈은 공사중지를 요구하여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고 신돈의 권세가 커가면서 공민왕은 신돈도 경계대상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신돈은 왕 앞에서는 허름한 옷을 입고 왕을 대하였으며 궁 밖에서는 스님 있데도 불구하고 여성을 취하고 불구하고 고기를 먹었으며 그의 집은 궁과 같이 화려했으며 뇌물들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신돈은 공민왕의 환심을 받기 위해 자신의 첩인 반야를 공민왕에게 받치기도 하였습니다. 훗날 반야가 낳은 아이가 공민왕 다음으로 우왕이 되었는데 그의 출세가 문제가 되어 조선을 건국하는데 명분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신돈의 권위가 점점 높아지자 공민왕은 신돈 또한 경계대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돈도 공민왕이 자신을 예전처럼 대하지 않는다 것을 느끼고 있었을 때 공민왕은 신돈에게 주었던 관직들을 다시 거둬들이고 공민왕이 직접 친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돈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1371년에 신돈이 반역을 꾀 한다는 첩보가 공민왕 귀에 들어왔습니다. 공민왕은 즉시 신돈을 체포하였고 수원으로 귀향을 보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신돈을 처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을 잘라 도성 문 앞에 매달아 버렸습니다.

6. 고려사에서는 신돈을 요승으로 기록하다.
고려사에서는 앞서 얘기 했듯이 신돈을 요승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공민왕을 꽤 하여 승려인데도 불구하고 음란하였으며 많은 부를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공민왕에 의해 처형을 당하였다는 기록으로 쓰여있습니다. 그때 당시 백성들 외에는 신돈을 좋아하는 계층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신돈의 개혁으로 땅과 노비를 빼앗긴 권문세족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 신돈의 모습이 공민왕 또한 싫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다고 하여도 현실에서는 정치적으로 아무로 도움이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노비 출신이 승려가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데 귀족출신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돈을 기록해 줄 사람들도 이 귀족출신들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려사는 조선초에 쓰인 책으로 조선의 건국에 있어서 신돈이 좋게 쓰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려가 망한 이유 중에 신돈도 포함을 시켜줘야 조선 건국의 명분이 하나 더 생기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신돈을 재평가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요승이라기보다는 백성을 위해 개혁을 추진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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