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순수한 사랑이야기는 몇 년 전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기고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시청한 드라마지만 한편으로 조선의 왕이 한 여인을 정말로 순수하게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도 들기도 하였습니다. 정조는 정말로 성덕임이라는 궁녀를 얼마나 애틋하게 연모하였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어린 정조와 혜경궁 홍씨 궁에서 쫓겨나다.
1762년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귀주 안에 가둬서 죽인 사건 임오화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사도세자가 귀주에 갇혀있는 동안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위시켜 버립니다. 사도세자가 폐위가 되자 부인 혜경궁 홍 씨와 아들 정조와 딸들은 더 이상 궁궐 안에 있을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할 수 없이 혜경궁 홍 씨의 친정인 홍봉한의 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정조의 나이 11살이었습니다. 정조는 아버지가 할아버지 영조의 의해 죽음으로 몰리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린 정조와 혜경궁 홍 씨는 친정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의 소식을 들어야 했으며 그들은 몸서리치는 슬픔 속에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자신들의 운명을 걱정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후 바로 다시 복권을 시켜 그의 가족들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게 하였습니다.
정조와 성덕임이라는 궁녀가 처음에 어떻게 만나는지는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추측으로 성덕임의 아버지는 혜경궁 홍 씨의 아버지 홍봉한의 일을 도와주는 중인 있었습니다. 아마 성덕임도 아버지 따라 홍봉한의 집안일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어린 정조와 성덕임은 이곳에서 인연이 시작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2. 궁에서 만난 궁녀 성덕임
정조는 궁에 입궁을 하자 어머니 혜경궁 홍 씨와도 떨어지게 됩니다. 혜경궁 홍 씨는 어린 정조를 영조 옆에 두어야 한다는 판단하에 영조가 사는 궁으로 거쳐를 옮기도록 영조에게 청을 하였습니다. 그 청을 받아들여 정조는 영조와 같은 궁에서 숨 막히는 왕의 교육이 받아야 했습니다. 어린 정조의 눈에는 모든 이들이 경계대상으로 보였기에 항상 긴장을 놓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만나러 갈 때는 긴장을 좀 내려놓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정조는 혜경궁 홍 씨가 친정에서 데리고 들어온 성덕임을 어머니를 처소에 갈 때마다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보는 것도 정조에게는 좋은 일이겠지만 궁녀가 성덕임을 잠시나마 볼 수 있는 것도 정조에게 어쩜 조그마한 낙이었을 겁니다. 정조는 성덕임에 대한 마음이 계속 자라나게 되면서 15세가 되던 해 성덕임에게 고백을 하게 되지만 성덕임은 정조의 마음을 거절하고 맙니다.
이유는 정조의 부인 세손빈께서 아직 후손이 없어서 후궁이 될 수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정조는 성덕임의 마음을 알고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3. 후사가 없는 정조
1776년 할아버지 영조가 돌아가고 그 해 정조는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정조는 복잡한 정치 속에 자신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서 어떻게든 민생의 보살피고자 노력하는 왕이었습니다. 항상 간장을 놓을 수 없는 왕으로 여인들에게는 그리 관심을 많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의 가장 큰 의무인 후사가 생기지 않아 조정과 왕실에서는 걱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로 정조의 부인인 효의왕후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들 사이에는 후사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효의왕후 아버지의 권세를 배척 하려는 정조의 목적과 정조를 보살펴주었던 화완옹주의 이상한 질투심으로 인한 방해로 사이가 좋아질 수가 없었습니다.
정조는 아직도 성덕임에 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궁녀들을 쳐다보지도 않아 후궁으로 간택된 여인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왕실의 어른들의 입장에서 30살이 다 되어가는 정조를 보면서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은 할머니 정순왕후의 명으로 후궁을 간택하게 됩니다.
정조는 정순왕후의 명을 받아 정조의 심복인 홍국영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맞이합니다. 그러나 홍국영의 여동생인 원빈은 후사 없이 일 년 만에 사망을 하고 맙니다. 이렇게 되자 정조는 다시 성덕임에게 후궁이 되어달라고 구원을 하지마 성덕임은 당호 하게 거절을 합니다. 정조는 억지로 후궁으로 맞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성덕임의 선택을 받아 주었습니다.
정조는 후사가 없으므로 다시 1780년에 다시 화빈윤씨를 후궁으로 간택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개월 뒤 화빈윤씨는 임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조는 성덕임의 대한 마음을 접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성덕임을 후궁으로 맞이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4. 정조 성덕임을 후궁으로 들이다.
정조는 성덕임에게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하였지만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일개 후궁이 왕을 거부한다는 것은 거의 사형감이었습니다. 성덕임 입장에서도 큰 용기를 내면서 왕의 마음을 거부한 것입니다.
아마도 성덕임은 자신이 후궁이 되면 왕실에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치적인 물살에 휩싸일까 봐 걱정이 앞서 거부하지 않았을까라는 개인적인 추측을 해봅니다.
정조는 성덕임의 측근들을 괴롭히는 방법으로 반 강제적으로 성덕임을 후궁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성덕임도 화빈윤씨가 임신을 하였다는 걸 알고 마음에 부담이 덜 했는지 정조의 마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화빈윤씨는 임신을 하였지만 아이를 낳지는 못하였습니다. 후사를 바라는 왕실의 기대와 조정의 기대가 16세인 어린 화빈윤씨에게 부담이 컸는지 아마도 상상임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에는 화빈윤 씨가 임신하였다는 기록만 있지 아이가 낳아다거나 사사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행히 정조와 성덕임 사이에서 정조의 아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때 정조의 나이 31살이고 성덕임은 30세였습니다.
5. 행복은 이리 짧은지~
성덕임이 아들을 낳자 정조는 성덕임을 정 3품으로 승격을 시키뒤 얼마 후 정1품 빈으로 봉합니다. 화목하다는 뜻을 담아 의빈이라고 직접 칭호를 내리기도 합니다.
성덕임은 정조의 유일 후계자 아들을 낳았지만 정조의 부인인 효의왕후를 존중하고 윗사람의 대한 예를 다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20여 년 동안 기다려온 사랑을 정조는 성덕임에게 마음껏 주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의 결실로 아들까지 있었으니 아마 정조는 성덕임과 있을 때는 한 나라의 왕이 아닌 한 가족의 가장으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성덕임의 아들은 3살이 되던 해 세자로 책봉이 됩니다.
그러나 행복은 이리 짧은지 성덕임은 1785년 두 번째 임신을 합니다. 성덕임이 임신 중에 귀중한 아들인 세자가 다섯 살 나이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는 정조의 첫 번째 아들 문효세자입니다.
그들의 슬픔은 물론이고 왕실과 조정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문효세자의 어머니인 성덕임은 슬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배속에 아이를 지켜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기에 슬퍼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성덕임은 아들이 아플 때 한 번도 안아주지도 못한 마음이 깊었는지 그녀의 몸은 조금씩 쇠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임신한 지 9개월 된 몸으로 배속에 아이 함께 성덕임을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녀의 유언은 효의 왕후에게 후사를 보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끝내 정조는 첫사랑이자 끝사랑인 성덕임과 영원한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6. 그 후 정조는~
아무리 사랑하는 여인과 아들이 죽었다고 해도 오래 슬펴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정조는 무엇보다 후사에 대한 책임이 남아있었습니다. 다시 수빈 박 씨를 후궁으로 들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정조의 다음을 이를 순조입니다.
정조는 성덕임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담은 글을 써서 그녀의 묘지에 함께 묻었습니다. 그 글이 어제의 빈묘지명입니다. 정조가 성덕임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를 글귀마다 담아 있습니다.
오늘날 정조와 성덕임에 사랑이야기도 어제의 빈묘지명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 입나다.
정조는 성덕임이 죽은 지 14년 후에 1800년에 성덕임 곁으로 갔습니다.
정조에게 성덕임은 숨 막히는 정세 속에서 유일하게 숨을 쉬게 해주는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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