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령군은 이름이 아닙니다. 고종이 내려준 칭호입니다.
뒤에 군자를 붙여줄수 있는 사람들은 주로 왕자나 종친들이었습니다. 그런 칭호를 당시 사회적으로 천민 취급받는 무당에게 칭호를 내려다는 것은 그녀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은 무당 진령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명성황후를 위기에 빠지게 한 임오군란 사건
1882년 조선에는 별기군인 신식군대와 구식군대 있었습니다, 구시군대는 신식군대와 차별을 받았는데 가장 심각한 입금 체불이었습니다. 나라에서 13개월치에 달하는 월급을 받지 못해 항의를 하자 한 달 치 월급을 쌀로 지불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에 지급한 쌀 속는 많은 모래와 썩은 쌀들이 섞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군인들은 분노하여 들고 일어납니다. 군인들의 월급을 다 해쳐먹은 민 씨 일가와 명성황후에게 격분한 군인들은 난을 일으키는 이것이 바로 임오군란입니다.
갑자스러운 난으로 명성황후는 급하게 궁녀로 변장해 궁을 빠져나와 도망치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명성황후는 광주와 여주를 거쳐 충주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에서 은신하게 됩니다.
상태 수습을 하기 위해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을 찾아 갑니다. 흥선대원군은 군인들을 위로하는 동시에 사이가 안 좋은 며느리 명성황후를 다시는 궁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죽었다고 선포합니다.
흥선대원군으로 인해 사망선고를 받은 명성황후는 어떻게 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녀는 속절없이 숨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2. 명성황후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해준 무당
민응식 집에서 두려움만 키우고 있었던 명성황후에게 어느 날 신령님의 계시로 중전을 뵙고자 왔다면서 무당이 찾아왔습니다. 집 안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녀를 명성황후와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답답한 명성황후는 그녀에게 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무당은 50일 안에 돌아 갈 수 있다면서 명성황후를 안심시켜주었습니다. 이 무당이 바로 나라의 국고를 아작을 낸 진령군 무당입니다.
명성황후와 진령군의 만남이 시작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황후는 무당의 말에 안정을 되찾으면서 고종에게 은밀하게 연락을 해 청나라에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청나라는 고종의 요청으로 군대를 한양으로 진입해 흥선대원군을 청나로 압송하였으며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인들 마저 체포하였습니다.
명성황후는 청나라의 힘을 빌려 무당이 예언한 날짜에 환궁하였습니다.
물론 무당인 그녀도 같이 입궁하였습니다.
그리고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아뢰어 진령군이라는 군호를 내리게 합니다.
3. 백두산 일만 일천봉 받친 제물
명성황후의 신뢰를 받은 진령군은 황후와 같이 창덕궁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황후는 진령군에 대한 믿음은 거의 맹신급이었습니다.
황후의 신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진령군을 언니라고 불러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진령군의 권력과 부귀영화는 명성황후의 믿음이 깊을수록 커져만 갔습니다.
왕실을 위해 산천기도와 제사는 끊임이 없었고 유교 사상이 뿌리인 궁 한가운데서 굿판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명성황후뿐만 아니라 고종도 같이 진령군에게 맹신하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명성황후와 고종은 관료의 인사 결정까지도 진령군의 말을 들었습니다. 안그래도 매관매직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는데 당연히 사람들은 무당인 진령군에 모여들 수밖에 없었고 고위 관료들조차도 그녀에게 쩔쩔매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도성 밖에서 진령군이 궐 안에 산다는 소문이 퍼지자 진령군은 눈치가 보였는지 궁 밖에 진령군이 모시는 관우신을 모실 수 있는 사당을 지어 달라고 명성황후에게 청합니다. 1년 후 한양의 북쪽에 북묘라는 사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 후 진령군은 그곳으로 거쳐를 옮깁니다.
진령군에게 이 유인이라는 양아들이 생겼는데 이 둘은 손 발이 척척 맞아 그들의 권세를 이용해 많은 재물들을 북묘에 쌓아두었습니다.
또 진령군은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의 건강기원과 나라의 안정을 기원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면서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쌀한섬, 돈 천냥 무명한필을 재물로 받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명성황후는 바로 실행에 옮겨 일만이천봉에 재물을 받칩니다. 이 많은 돈은 거의 진령군 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로이해 나라의 국고는 거의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런 수작으로 진령군은 명성황후를 10여 년 동안 마음대로 뒤흔들었습니다.
참고로 쌀 한섬은 지금의 쌀 150~200kg 쌀 한섬의 가격이 대량 5냥이라고 합니다
4. 진령군은 명성황후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했다
진령군의 만행으로 흥선대원군이 모아놓았던 나라의 재물들은 바닥이 나고 한 나라의 국모가 무당의 말에 휘둘리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신들은 고종에게 진령군을 쫓아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지만 오히려 고종은 분노하며 탄핵상소를 올린 대신들을 멀리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그런던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명성황후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일본 낭인들에 의해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말았습니다.
진령군의 든든한 빽이었던 명성황후가 시해당자 그녀의 모든 권력과 재물은 순식간에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녀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체포당했지만 재산을 반납 후 풀려났다는 이야기도 있도 명성황후 따라 죽었다는 애기도 있고 몰래 숨어 살다가 그냥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진령군은 명성황후가 어떻게 죽을지는 예상을 못했나 봅니다.
명성황후와 진령군은 끝은 같은 운명이었는데 말입니다.
진령군이 어떻게 생을 마감하였는지는 궁금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모은 재물들은 백성의 눈물과 땀이었는데 그 재물들은 다시 백성들에게 돌아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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