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정신까지 지배하고 싶어했던 우리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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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조선의 정신까지 지배하고 싶어했던 우리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by 5914 2024.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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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3발의 총을 맞아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원흉이라고 하며 그를 처단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 조선에게 얼마나 흉한 일을 하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가난한 농민 출신이 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까지 되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죠수번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 였습니다. 아버지가 이토 다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아버지 성이 이토로 바뀌면서  그도  이토 리스케가 됩니다.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 이후 개명한 이름입니다.
이토 히로보미는 출세에 대한 욕심이 있어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고 이를 지켜본 본 사람이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한 사상가인 요시다 쇼인을 추천해 줍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제자가 되어 그의 사상을 열심히 흡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시다 쇼인은 정치적으로 밀려 처형을 당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스승의  부국강변론과 애국사상을 받아  일왕을 받들어 외세를 베격하는 모임으로 존황양에 들어가 적극적인 활동을 인정받아 기도 다카요시의 시종으로 준무사가 되면서 한 단계 신분상승을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동료 5명과 함께 영국 유학을 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시설등을 견학하고 견문을 통해 영국과 일본의 압도적인고 국력 차이 목격을 하고 개국론 사상으로 전환합니다.

 

 

영국유학 생활 중 일본 조슈번에 외국함대가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일본으로 돌아가  전쟁을 막기 위해 중재를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 조슈번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이토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인정을 받았고  전쟁의 배상금을 권력을 잡고 있던 막부 쪽으로 돌려났습니다.
이를 계기도 막부타도에 성공을 하면서 일왕 친정체제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이란 일황(천황)을 중심으로 국가를 세워 정치 경제 문화등을 근대화를 성공시킨 개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토 히로부미는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들어섭니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조선을 정복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일어났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일본 정치에 충실해야 한다는 내치파편에 섰습니다.
내치파의 승리로 조선의 침략은 일단 보류되었습니다.
 내치파의 승리로  이토 히로부미는 승승장구하여 일본의 중심에 서게 되고 헌법을 만들기 위해 유학을 다녀와 일본 헌법을 작성하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89년에 일본 내각제도가 처음 만들어지면서 초대 총리대신이  됩니다.
이후 3번의 총리자리에 더 앉게  됩니다. 
일본은 러. 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본격적인 일본은 조선의  침략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를 특파 대사로 대한 제국에 파견합니다. 그의 임무는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기 위함이었고 이토 히로부미는 강제로  을사늑약(을사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대한 제국에 자리를 잡아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해하고 스스로 초대 통감이 돼버립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지배하려는 만행들을 망설임 없이 하였고  그의 만행의 행보를 맞은 것은 안중근 의사가 쏜 총알을 맞고서는 1909년 10월 26일에 멈추었습니다.


 

2. 이토 히로부미의 만행

이토 히로 부미는 1895년에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시해하였던 을미사변에  개입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한국 특사로 들어와 고종에게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넘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그의 뜻대로 외교권을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가 을사오적이라고 불리는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박제순 등을 매수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이토 히로부미는 지금의 장관급에 8명을  한방에 모아 놓고  뒤에는 군인들을 배치한 다음 을사늑약에 도장을 찍으라고 압박을 강하였습니다.
이 압박 속에 이완용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서 체결을 주도하였고  결국 을사늑약이 그들 손에 체결되면 외교권은 박탈되어 버립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종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궁궐 출입을 제한하였고  일본 통감이 직접 고종황제를 알현할 수 있게끔 만들어  자신이 결정한 사항을 통보하고 강압하여 고종을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려고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특사 파견의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키고 아들인 순종을  즉위시켰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여기에 한일 신협약에 근거하여 각 부처의 차관에 일본인을 임명하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주도 면밀하게 대한 제국을 삼키고 있었습니다.

3. 이토 히로부미의  무서운 계략

이토히로부미는  외교권만 박탈한 것뿐만 아니라 대한 제국을 문명화를 만들겠다는 핑계로 내정까지 간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찰력을 증강해  민생을 안전시키고  학교 설립으로 여성도 교욱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었고  농 공업 개선으로 생산력을 증가해주었으며 도로와 배수로도 깔아 주었습니다.  
고종이 해주지 않았던 일들을 일본 통감이 들어와 해 주니 민심은 당연히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좋은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도 강제로 대한 제국을 침략하는 것을  반대하는 온건파에 속한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평화주의고 우리에게 자선을 베푸는 인간은 아닙니다. 
시민들에게 선심을 베푸는 이런 행위는 고종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동시의 일본의  위상을 높이는 것입니다.
일본을 추앙하게 끔 만드는  행위입니다. 우리  시민들이 스스로 일본화되길 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 제국이 어느 정도  경제적 발전이 되어야지 착취할 것들이 많아지고 착취할 액수도 커지기 때입니다.   이 모든 건설과 설립에 들어간 많은  자금들도 억지로 일본에게 빌리게 하여  이루어지게 한 것입니다.
또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어린 영친왕을 10살 무렵부터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철저로 게 일본 교육을 시켜  정신적으로 일본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가 일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거나 일본에게  흡수되길을 원했던 것입니다.
 어쩜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의 민족 박탈을 계획한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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