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많은 딸들이 있었습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딸들을 빼고도 7명의 옹주가 있었습니다. 영조는 그 딸들 중 유독 이뻐했던 딸들도 있는가 하면 유독 미워했던 딸도 있었습니다.
영조의 유독 미움을 받았던 딸과 영조의 사랑을 받았던 딸들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1. 화순옹주
화순옹주는 1720년에 영조와 정빈 이 씨 사이에 1남 2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납니다.
어머니인 정빈 이씨는 화순옹주가 태어난 이듬해 27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고 친언니인 화억옹주는 첫돌도 안되어서 세상을 떠나고 오빠인 효장세자는 9살에 요절하여 그녀가 궁안에서 의존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버지 영조뿐이었습니다. 영조의 장녀로 궁안에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나 큰 궁궐 안에서 진심으로 의존할 사람이 없어 항상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았을 것입니다. 11살 때는 순정이라는 궁인이 몰래 독약을 먹여 죽이려고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1732년 영의정을 지낸 김흥격의 아들인 월성위 김한신에게 시집을 가는데 영조는 화순옹주의 짝으로 심사숙고하여 고르고 골라 인물과 인품이 좋았던 인물이었습니다.
화순옹주는 혼인 후 남편과 사이가 좋아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진 부마와 착한 옹주"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사이에는 안타깝게 자신이 생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부부사이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김한신이 서른 아홉에 병으로 사망을 하게 되자 화순옹주는 슬픔보다 거의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남편이 사망한 후 그녀는 물 한 모금을 먹지 않았습니다. 영조가 너무 걱정이 되어 찾아야 뭐라도 먹으라는 명을 내리지만 그녀는 아버지인 왕의 명을 어기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결국 화순옹주는 곡기를 끊은지 14일 만에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양반의 여인이 남편을 따라 죽으면 열녀라하여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 나라에서 열녀문을 세워주었습니다. 조정에서도 화순옹주에게 열녀문을 올리자는 말이 나오자 영조는 화를 내면서 늙은 아비를 두고 자식이 먼저 죽은 것은 천하의 불효라고 하여 끝까지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열녀문은 남편의 가문에게만 좋은 것이지 죽은 열녀들에게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제도였습니다.
2. 화평옹주
화평옹주는 영조와 영빈이 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입니다. 영조는 자신의 마음 가장 많이 알아준다고 하여 화평옹주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한편에서는 화평옹주가 어머니 영빈 이 씨의 외모를 가장 많이 닮아서 좋아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화평옹주가 5살이 되던 해에 천연두를 앓게 되었는데 영조는 딸의 회복을 위해 모든 형벌을 정지시킬 정도로 화평옹주를 아꼈습니다.
화평옹주의 성품은 어질고 온난한 성품으로 사도세자와 더불어 두 여동생들과도 사이가 좋았으며 사이가 안 좋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서 어느 정도 중재 역할도 하여 화평옹주가 살아있을 때는 둘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화평옹주는 12세의 나이에 예조 참판 박사정의 아들인 박명원과 혼례를 올리는데 영조가 화평옹주를 너무 이뻐하여 궁안에서 4 동안이나 살게 하였습니다. 원래 시집간 옹주나 공주는 궁안에서 살 수없는 게 법도였는 영조는 예외를 적용하여 화평옹주를 궁안에서 살게 한 것입니다.
첫째인 화순옹주가 시집을 갔을 때 보통 옹주들이 받는 10배 이상의 예물을 보내어 논란이 일어났는데 화평옹주가 시집을 갈 때는 화순옹주보다 더 많은 예물들을 보내었습니다.
이렇게 이뻐하였던 황평옹주는 22세에 아이를 출산을 하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영조는 화평옹주 빈소에 찾아가 밤을 새워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화평옹주의 장례식 또한 호화스러웠으며 화평옹주의 삼년상 동안 궁 밖을 나가는 일이 있으면 화평옹주의 사가에 들러으며 또 화평옹주의 사가와 가깝다는 이유로 거처를 창경궁으로 옮기기까지 했습니다.
그 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자 혜경궁 홍 씨는 화평옹주가 살아계셨으면 둘이 관계가 이리 나빠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록 화평옹주는 궁안 모든 사람들의 그리움이 되어 버렸습니다.
3. 화협옹주
화협옹주는 화평옹주와 같은 어머니를 둔 영빈 이 씨와 영조의 둘째 딸입니다. 화협옹주는 앞에 3명의 언니가 더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습니다.
화협옹주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효장세자가 9살 나이에 요절하였고 영조는 이로 인해 아들을 기다렸는데 영빈 이 씨는 연달아 딸만 넷을 낳았으며 연이어 다섯째도 딸인 화협옹주가 태어난 것입니다. 영조는 아들이길 기대했는데 화협옹주가 딸로 태어나 실망하여 정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2년 뒤 사도세자가 태어났는데 조금이라도 있던 관심이 사도세자로 넘어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세자도 시간이 지날수록 영조의 집요한 꾸지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화협옹주는 사도세자만큼은 미움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 위로하는 처지 되었습니다.
화협옹주는 영의정 신만의 아들인 신광수랑 혼례를 올리지만 먼저 시집간 두 언니의 비해 화협옹주는 조촐하게 혼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영조의 무관심보다는 나라의 가뭄이 심해 어쩔 수 없이 조촐한 혼례를 치러진 것 같습니다.
영조는 치국을 하면 사도세자에게 들러 밥은 먹었느냐? 묻도 대답을 들으면 자신의 귀를 씻고 돌아갔는데 귀를 씻을 물을 화협옹주의 집이 있는 쪽으로 버렸다고 합니다. 귀를 씻는다는 것은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로 사도세자나 화협옹주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0세의 나이로 화협옹주는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영조는 슬펴하였다고 합니다. 사도세자는 누이가 세상을 떠나니 이 슬픔을 비유할 때가 없다며 크게 슬퍼하였습니다.
영조는 화협옹주가 살아있을 때는 무관심하였어도 죽고 나서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그리워하고 애통해하였습니다.
2016년에 남양주 상패동에서 화협옹주의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아버지 영조가 세상을 먼저 간 딸에 대한 슬픔을 적은 글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한중록에서는 화협옹주는 효가 깊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나 영조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습니다,
4. 화완옹주
화완옹주는 영조와 영빈이 씨사이에서는 막내딸이었습니다.
화완옹주도 영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영조는 친언니인 화평옹주가 죽은 후에는 그녀의 대한 사랑이 더 하였습니다.
12세가 된 화완옹주는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낸 정우량의 아들인 정치달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화완옹주도 화평옹주처럼 예외를 적용하여 한 동안 궁안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막내딸인 화완옹주는 홀로 받는 영조의 사랑이 당연히 여겨왔지만 그녀도 철이 들면서 홀로 받는 아버지의 사랑이 만약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화안옹주는 결혼 후 첫딸을 낳았지만 아이는 1살도 안되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식을 잃은 화완옹주가 걱정이 되어서
영조는 화완옹주는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2달 후 남편인 정치달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날 영조의 첫 부인인 정서왕후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영조는 슬퍼하는 딸을 위로하여야 한다며 나라의 국모이자 부인의 빈소를 버리고 화완옹주에게 달려갔던 것입니다. 조정대신들은 영조의 행동에 경악하여 격렬하게 행차를 반대하였으나 끝내 영조는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아이와 남편을 잃은 화완옹주가 너무 걱정이 되어 보살펴줘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궁 안에 살게 하였습니다.
당시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끝을 보이는 단계에 도달한 상태였습니다. 화완옹주는 이들 부자 사이를 중재역할을 도맡아 하였지만 역 부족이었습니다.
결국 1762년에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로 인해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 이 일어났습니다.
일부에서는 화완옹주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시각도 있는 나 <조선왕조실록><한중록>에서는 그런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아들 정조는 영조의 후계자의 훈련을 위해 영조와 같은 궁에서 지냈는데 이 궁 안에는 화완옹주도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정조를 보살폈던 할머니 영빈 이 씨가 죽자 고모인 화완옹주가 정조를 보살피게 되었습니다.
이때 어머니 혜경궁 홍 씨는 다른 궁에서도 살았지만 아들을 보살필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영조의 사랑이 여전하였던 화완옹주는 정조를 지극히 보살펴 주었지만 그 도가 지나쳐 정조에게 집착하는 수준까지 가게 되어 정조의 부인 세손비까지 질투하여 둘의 관계를 멀게 만들고 고모인데도 불구하고 혹독한 시어머니 노릇까지 하였습니다.
정조가 사춘기 시절부터는 고모인 화완옹주의 병적인 집착이 싫어 점점 멀리하게 됩니다.
영조의 사랑은 화완옹주인 양자인 정후겸에게 까지 넘어가 정후겸은 영조와 화완옹주의 후광을 입고 권세를 키웠는데 이 세력이 정조와 대립하는 힘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화완옹주는 양아들 정후겸과 같이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데 노력을 다하였지만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결국 양 아들 정후겸은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화완옹주도 처형을 요구하였으나 정조는 화완옹주의 작호를 삭탈하고 강화도 교동부에 옹주에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녀 나이 72세에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는 화완옹주가 아닌 정치달의 처가 죽었다고 기록에 남게 되었습니다.
5. 화유옹주
화유옹주는 영조와 귀인 조 씨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12세가 된 화유옹주는 호조참판 황재의 아들인 황인점을 부마로 결정해 혼례를 하려고 하였지만 그 해 이 복 언니인 화협옹주가 사망을 하여 혼례가 연기되어 2년 뒤에 혼인을 하게 되면서 사가로 내려가게 됩니다.
화유옹주는 영조에게 이 복언니들처럼 크게 사랑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미움을 받은 기록 또한 없습니다.
영조의 딸들 중 그래도 순탄한 삶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영조가 궁 밖을 나가는 일이 있으면 화유옹주를 보러 종종 사가에 들렀다고 합니다.
그녀는 몸의 종기로 인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조카인 정조가 왕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정조는 고모인 화유옹주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였으며 3년간 녹봉을 그대로 지급하라고 전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화유옹주 제문"을 직접 지워 위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후 정조는 화유옹주의 아들을 황기욱을 챙기며 의성 현령으로 봉하기도 하였습니다.
화유옹주는 조카인 정조에게 소중한 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6. 화령옹주, 화길옹주
화령옹주와 화길옹주는 영주의 마지막 후궁 숙의 문 씨의 딸들입니다.
어머니 숙의 문 씨가 영조의 사랑을 받고 있을 때 오빠인 문성국 와 김상로와 결탁하여 사도세자의 행동들을 무고하여 둘의 사이를 이간질하였습니다.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 아들인 정조는 즉위직후 문성국과 숙의 문 씨의 죄를 폭로하여 숙의 문씨의 작호를 삭탈한 뒤 사사하였고 오빠와 어머니는 노비로 만들었습니다.
조정에서는 화령옹주도 작호를 삭탈하고 조선밖으로 안치하기를 청했지만 영조의 혈육이면 숙의 문 씨와 문성국과는 상관이 없다면서 정조는 화령옹주의 작호를 유지시켰습니다.
그녀는 삭녕군수 심정지의 아들 심능건과 혼인하여 정조의 비호아래 무탄하게 살았고 69세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는 11세 나이에 구선행의 손자인 구민화와 혼인을 하였는데 그녀는 19세 사망하여 어머니 숙의 문 씨가 정종에게 숙청당하는 사건을 겪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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