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대왕을 도와 조선을 이끌었던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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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세종대왕을 도와 조선을 이끌었던 인물들

by 5914 202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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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셀 수 없는 업적들을 남기시고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든 
위대하신 분 입니다. 
세종대왕이  정치 , 과학기술, 천문,  예술등에  다양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신하들의 능력을 잘 파악하고 
그들이 제 능력발휘를 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세종대왕의 통치력 덕분 일 것이다.
그래서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을  이끌었던 신하들에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1.정치

 1.정무처리에  능숙한  황희

황희는 1362년에 태어나서 1452년에  90세까지 살았습니다.
황희는 조선 초기의 문신, 재상으로  현명함과 냉철함으로써 세종의  신임이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먼저 황희의 정무 능력을  알아본 사람은 태종이었습니다.
당시 황희는 개국공신이 아니었는데도  공신 대접을 받을 만큼 태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허나 양녕대군 세자 폐위에  반대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길에  오르게 되었지만
세종은  황희에  능력을  알고 있어으므로 세종이  즉위 한 뒤 그를 다시  복직하게  해 주었습니다.
세종은 황희의 업무처리를 항상 신뢰했으며  황희 또한 세종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황희도  부정부패가 아주 없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세종은 그래도  황희를 옆에 두었다고 합니다.
황희가 왕에게 신임받는 이유는 큰일과 문제가 생겨을 때 의심 나는 것을 귀신처럼 알아내고 좋은 계책과 의견을 
왕에게 주었으며 왕에게 과오가 없도록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인재들을 식별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어린 인재들을 등용해 조선의 반석을  든든하게 하였습니다.
세종은 이런 황희를 정승과 영의정 자리에 올려놓고 87세까지 일하게 하였습니다.
 

2.음악을 사랑한 남자 매사성

매사성은 1360년 온양에서 출생하여  1438년에 별세하였습니다.
조선초 문신, 유학자로서 황희와 같이 세종을 도와 조선을 이끈 인물입니다.
매사성은 조선 개국직후    태조로부터 예의좌랑직을 제수받았고 태종 때는 대사헌으로 임명되었으나 역모사건에
휘말려 처형직전까지 같습니다.  당시 영의정 서석린 와 황희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 해지만  유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예조였던 하륜이  매사성의  음률에 남달리 능함을 알고 예악을 정비하기를 태종에게  청하여 다시 조정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맹사성은 전통 음악과 중국 음악을  조화 합하는 방향에서 음악을 정비했습니다.
세종 시대에는 여진정벌을  다른 신하들을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에 대한 회유와 정복을 병행하면서 주도면밀한 전략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했습니다.
 맹사성은 평소에 소를 타고 피리 부는 것을 좋아했으며 나라에서 주는 녹봉으로만 삶을 살아 항상 가난하게 지냈습니다.
효성이 지극하여 몇 번이나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 번도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성격도 유하여  조정 간의 갈등적인 요소들은 잘 풀어가는인물이었습니다.
 

3.청백리의 상징 류관

류관은 1346년에 태어나서 1433까지 살았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하다가 조선 건국에 참여한 공로로 개국원종공신이 되었고 태종 때에 대제학을 역임했으며, 세종 초기에는 우의정에 올랐습니다.
류관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렀으며, 황희나 맹사성에 앞서 재상의 초상으로 여겨졌던 인물이었습니다.  미담으로 세종이 류담이 죽자 세종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흰옷과 흰 산선을 차려입고 홍례문 밖에 나가 눈물을 쏟았다고 합니다.  세종이 마음으로 존경하는 인물로 여겨집니다.
깐깐한 성격의 류관은 형평성이 떨어지는 형벌 체제를 재 정비하였고 유학자로서  불교폐지를 주장하였고, 포폐정책도 주장하였으나 정책에  쓰이지는 못 했습니다.
태종 때  대사헌에  오르지 5개월 만에  파직되었으나  세종 때  류관의 인품과 학문 수준 높은 학문실력을 알고 있므로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입니다.   류관은 나이가 많아  세종에게  사직을 청했지만 세종은 명하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류관 나이 80세가 다 되어서야  그의 사직을 허락하였습니다.
류관의 많은 청빈한 일화들로  초가집 한 칸과 베옷과  짚신으로만 살았으며 , 태종이 그의 집에  담이 없어서  몰래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고,  류관이 굶고 다닐까 봐  몰래 음식을 내리기도 하였답니다.
제자들과도 사사로운 정을 피하기 위해  제자들에 이름을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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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국방

1.무관  최윤덕

최운덕은 1347년에  태어나 1404까지 살았습니다.  최윤덕의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무인의 집안이었습니다.
일찍이  부친을 따라 여러 전장에서 무공을 세워습니다.  병조판서를 거쳐, 무신으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한 무인 출신으로 재상에 오른 몇 안 되는 인물입니다. 또한 무인으로 남은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해 스스로 정승 자리를 놓은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세종 때 유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탈이 계속되자 조정에서 대마도의 정벌을 결정하고 이종무, 유정현, 최윤뎍을  군도절제사로 삼아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습니다.
정벌에 성공한 후 대마도의 경상도 편입하는 대신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여 삼포를 개항했다.  포용정책으로, 오랜 기간 왜구침입이 없어졌습니다.
파저강 인근의 여진족 이만주를 정벌하고 평안도에  4군을 설치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상왕 태종과 세종에게  도성의 성곽의 보수할 것을 건의하여  도성수축도감을 설치하고 세종 4년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하였습니다.  세종은 최운덕에게 성보를 여러 도성의  수축의 임무를 맡겨서 사람들은 최윤덕을 축성대감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최윤덕의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하고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묵은땅에 농사를 지었으며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호랑이를  잡아 원수를 갚아 주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2.북방의 지킴이 김종서

김종서는 1383에 태어나서 1453년까지 사망했습니다. 
김종서는 무관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몸이 왜소하고 책을 좋아해서 무예보다 학문에  더  심취하였습니다.
태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올랐으나  그의 빛을 발휘하지는 못했습니다.
세종이 김종서의  능력을  알아보고 감찰직을 주어서  지방으로 돌게 하여  지방의 실상을  파악하게 하였습니다.
함경도 두만강 유역에 여진족이 자진 침공으로  세종은  김종서에게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여진족을 방어하고  
육진개척을  하게 하였습니다
또 야선 침입하여 요동지방이 소란해져 평안도절제사로 파견해  잠잠하게  하였습니다.
김종서는  무관으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으나  문신으로도  뛰어난  면모를  보여 황희나 맹사성에게  인정받은 
인물입니다.
세종, 문종, 단종을 모신 충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과학기술, 그리고 천문

1.천문학자 이순지

이순지는 출생은 정확한 기록되어 있지 않고 1465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이순지는  역산 산학 역학등 당시  학자들이  기피하는 학문을  심취 있게  연구하였습니다.
특히 역산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마침 세종이   천문학의 중요성을  크게 관심 갖고 있어 따로 연구하는 기관을  만들어 연구하게 하였습니다.
세종은 이순지의  천문 실력을  처음에는 신임하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온 산학자 방문 한 뒤  이순지가  천문학의
실력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이순지의 의견을 모두 인정해주었습니다.
세종의 지시로 이순지에게 기존에  천문역서의 문제 점을 보완하고 중복되는 것을  삭제하고  천문 지식이 깊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천문학 서적을 편찬하라는 명을 받아 편찬 한 서적이 "제가역상집"입니다.
그 외도 "교식추보법" "칠성산외 편 "  '칠성산내편' 등 천문학과 역학의 책들을  편찬하였습니다.

2.조선의 발명왕 장영실

장영 실은 1390년에 태어나고  사망시기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장영실은  관기의 아들로 관노의 신분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주가 남다름이  조정에 까지 알려져서
태종이 장영실을  발탁하였습니다.
세종은 그의 손재주를 인정하여 대신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비신분을  벗어나게 해 주고 벼슬 또한 내립니다.
또 중국에  유학을 보내 천문시설과 중국의 기술을 배워오게  하였습니다.
세종의 적극적인 지원의 성과로 해시계, 홍천의, 혼상, 물시계인자격루, 측우기. 간의대, 갑인자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발명으로 천문학의 발전을 시켰고  강우량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홍수 예방에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장영실금속활자발명에도 참여하여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세종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으로  장영실은 불경죄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졌습니다.
 
 
세종대왕은  조선 초기 집현전을 만들어  많은 학자들과 학문의 기반을 세웠고,국방과 과학에  힘을 실어 민생을 보살폈으며,   음악에도 조애가 깊어서  조선의 음악 큰 획을 남기 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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