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양대군 한명회를 만나 어린 단종의 왕좌를 빼앗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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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수양대군 한명회를 만나 어린 단종의 왕좌를 빼앗기 시작하다

by 5914 2024.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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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은 한명회를 책사를 둔 후 계유정난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어린 단종의 왕좌를 빼앗고 
단종을 따르는 신하들을 잔혹하게 죽인 수양대군의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합니다.

 

1. 수양대군과  한명회 그리고 만남  

수양대군

1417년 태어나서 1468년에  사망했습니다.
수양대군은 조선 7대 왕으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둘째 아들입니다. 
수양대군은  몸이 약한 형 문종과는 달리  사냥과 활 쏘기를 좋아했으며  학문 또한  견해가 깊었습니다.
대군시절에는 세종의 대신해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 하기도 했습니다.
문종이 즉위한지 2년 만에  죽으면서  왕위에  오르고 싶은 숨은 욕망을 실천하가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켜   그 계기로 왕이  됩니다. 왕권강화 목적으로 의정부서사제와 집현전을 폐지했습니다.
그리고 정국의 안정을 위해 경제육번을 정비했고 경국대전을 찬술을 시작했으며 관제개혁, 국방력 강화, 직전제 실시하는 업적도 남겼습니다.

한명회

한명회는 1415년에  태어나  1487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개국공신 한상질에  손자인 한명회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머리는 영특하였으나  과거에는  번번히 합격하지 못했고, 오랫동안 실의의 나날을 보내며 권람과 더불어 전국을 떠돌며 산천을 주유했습니다
마침 수양대군을 만나 그의  의중을 한번에 파악하여 수양대군의  책사가 됩니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을  성공 시키고 사육신 사건을 처리하여  권람, 신숙주와 함께  공신이 됩니다.  또한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  시집을 보내어서 왕의 장인인 부원군이  됩니다.
한명회는 이시애의 난으로  한명회와 신숙주가  연류제기설에  생기는 바람에  삭탈관진을  당하였으나  곧  복귀되었습니다.
한명회는 세조, 예종을  거쳐 성종까지  왕을  모시면서  권력 누릴 수 있으거라 믿었으나  성종 때  압구정 정자 사건으로 화려한 정치 인생을  끝내게  됩니다.

수양대군과  한명회의 만남 

수양대군과 한명회를 연결 시켜준 인물은  한명회의 절친 권람입니다.
권람은 한명회의  권력욕을  알고 있었고 수양대군이  왕이 되길을  원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권람을 그들 만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권람은  단종이  즉위 한지 얼마 안 되어서  마침 그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주군께서는 종실의 버금으로서 사직을화 위하여 난적을 치는 것이니
이는 명분도 바르고 말도 사리에 맞는 말인바, 성공하지 못할 리가 만무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결단해야 할 때 바로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그 앙화를 입는다.' 하였으니,
바라건대 주군께서는 익히 생각해 보소서."
한명회는  이런 말로  수양대군에게  난을  일으킬 수  있는 명분을  말해 주었습니다. 
즉 김종서와 대신들이  어린 왕을 등을 업고  권력을 남용하여 나라가 혼란스러우니 수양대군이 나서서  바로 잡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수양은  자기가  하고픈 말을  한명회가  해주었으므로   바로  책사로  들입니다.
그 둘은  천천히  계유정난을  도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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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계유정난을 일으키다

단종은 12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수렴청정할  어머니나 할머니도  안 계셔서  종정대신들이 왕의 일들을  대신하고  있었으므로  김종서 , 황보인 및 대신들의  권세가  날로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양다군은 왕권의  힘이  약해지는 것이  못마땅했으며  대신들이  수양을  경계하기 위해  안평대군을  도모한 것도 불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책사로  들여  난을  일으킬  계획으로  홍달손, 양정 등  당대 무사들을 수하에  들여 무력을  양성하고   종정대신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명나라 사은사로 자처하여 명나라에  간다 오기도  합니다.
한명회에게는 살생부를  만들게  했습니다.
1453년 음력 10월 10일 밤에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서  김종서를  철폐를  쳐서 죽이고  그의 가족들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날밤  한명회는 조정대신들을  조정에 모두  불러들여 살생부에  적힌  대신들을  죽이는 만행을  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계유정난입니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의  명분은 김종서, 황보인이 정분등과 부동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는 것입니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병조판서, 이조판서, 영의정을 겸하여 단종의  섭정을  하였습니다.
수양대군을  포함한 한명회 권람 홍달손 등 계유정난에  참여한  사람들을  정난공신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안평대군은  강화로 유배시킨 뒤  사사하였습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이후로  완전한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3 단종 복위운동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 정권을 잡은 뒤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의 나머지 측근들을  죄인으로 유배를  시켜서
단종을  압박하기 시직 합니다. 결국 1455년 음력 6월에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1456년 음력 6월에  단종을  복위하고자 하는 신하들이  명나라 사신들을  위해  연회를  기회로 삼아  수양대군인 세조와 세자를 제거하는 계획을 세우지만  실패로 돌아갑니다, 사태의 불리함을 느낀 김질은 장인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폭로합니다. 
단종 복위를 도모하고자 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등 모두 사형을 당하였고  그들의 가족들도 처형이 되었고  친척들도  노비나 관노로 보내졌습니다.
단종 복위 실패 사건이  사육신 사건입니다.
사육신 사건으로 500명에서 800여 멍이 처형되었고  그다음 해인 1457년에 단종은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면목으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습니다.  단종은 영월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실록에는 자살로 적혀있으나  다른 기록들을  보아 세조가  사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해 금성대군도 단종 복위에 연류 시켜서  사사시킵니다.

4. 세조 현덕왕후의  저주에  시달리다.

현덕왕후는 단종의 어머니로 만약에  현덕왕후가  죽지 않고 단종 옆에 살아 있었으면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여인이었으나 안타깝게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고 맙니다.
세조에게는 형수가 됩니다.
현덕왕후 혼백이  세조의 꿈에  두 번 나와 저주를 내렸다도 하는데   첫 번째  꿈에서는  " 너도 내 아들을  죽이려 하니  나도  니 아들을  죽이겠다" 며  몹시 화난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꿈을  꾼 뒤  진짜  세자인 의경세자가 죽었습니다.  세자의 죽음의 화가 난 세조는 현덕왕후  무덤을  파혜치는 폐륜을  범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는 현덕왕후 혼백이  세조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는데  그 후  세조는 피부로  고통받기  시작합니다.
고통스러운  피부병은  세조의  몸과  마음을  허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세조의 원손 또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세조가 죽은 뒤  예종이 즉위하나  13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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