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는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큰 참폐로 인해 청나라의 볼모로 끌려간 왕세자입니다. 8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두 달여 만에 많은 의문을 남기고 갑자스럽게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지 써볼까 합니다.
1. 소현세자 청나라 볼모로 심양을 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는 청나라에게 큰 참패를 해서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식들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청나라의 항복의 조건 중에 세자를 볼모로 데리고 간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아들은 아직 어려서 그를 대신해 소현세자 동생인 봉림대군도 같이 볼모가 되어 소현세자와 같이 가겠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소형세자와 그의 일행들은 청나라 심양까지 가는 길은 엄청 험하였습니다.
세자시강원에서 기록한 심양일기에서 보면 청나라가 소현세자에게 마련해 준 심양관에서 지냈는데 방이 18칸이고 했습니다. 출발할 때는 180여 명이었으나 하나둘 모인 인원수가 늘어 500여 명까지 간다고 합니다. 그 많은 인원들이 생활하기에 한없이 부족한 곳이었읍니다. 이런 예만 봐도 그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소현세자 무역을 하다
당시 청나라의 사람들은 조선의 물품들을 많이 좋아하였습니다. 소현 새자가 청나라의 있으니 소현세자 쪽으로 은밀히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그중 청나라의 팔왕이 적극 거래를 요청하였습니다, 세자빈 강 씨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역관 서상형과 이신검의 도움을 받아 거래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물품들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모피, 종이, 담배, 홍시. 인삼, 약재등을 좋아했습니다. 소현세자부부는 이렇게 번 돈으로 심양관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그리고 인질로 잡혀온 조선인들을 사 와서 다시 조선으로 돌려 보내 주었습니다.당시 이렇게 조선의 노예를 사와 조선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속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무역으로 인해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고위 관직들과 많은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런 교류로 청나라가 조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때 원만하게 넘어갈 수 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인조는 이런 소현세자부부의 행보를 좋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장사를 한다는 것은 하층민들이 하는 것인데 그것을 세자부부가 하고 있고 조선의 원수인 청나라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 청나라 식량지원을 끝다.
1642년에 청나라는 소현세자에게 식량지원을 끝게다고 선언합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물품과 식량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도 명나라와 전쟁중고 기후변화로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소현세자에게 식량을 끝어버리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대신 땅을 줄 테니 알아서 농사를 지어서 생활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소형세자가 받은 땅은 완전 황무지여서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이때 세자빈 강 씨는 조선인의 노예를 사 와 농사를 짓게합니다, 자기 백성을 사와 농사를 짓게 한 것입니다. 소현세자부부는 이들에게 성과제을 도입해서 사기를 넣어주어 더 열심히 일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로 심양관에 필요한 식량의 양의 3배 이상의 수확을 거두어 었습니다. 게다가 품질 또한 좋아서 남은 곡식들을 고가에 팔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소현세자 부부는 어려운 상황을 명분보다 실용을 먼저 생각하여 심양관 사람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4. 소현세자 자금성에 가다
청나라는 1644년에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에 있는 자금성으로 들어갑니다. 이때 소현세자도 같이 동행을 하게 됩니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외국인이 선교사인 아담샬을 만나게 됩니다. 소현세자는 그를 통해서 국제정세와 과학기술, 새로운 문물들 새로운 사상등을 알게 됩니다. 자금성의 생활은 짧았지만 소현세자에게 중요한 경험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1645년 2월에 청나라는 소현세자에게 조선으로 귀국하라는 명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5. 조선으로 소현세자 귀국을 했지만 결국은~
소현세자는 자신이 아담샬에서 배워온 지식들을 조선에서 널리 가리켜 조선을 강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안고 돌아왔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소현세자의 생각과 달리 아버지 인조는 냉랭하게 소현세자를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학질로 죽고 맙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실록에서도 독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남긴 기록까지 있습니다. 지금도 인조가 죽였다고 주장하는 쪽과 그냥 병사라고 주장하는 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극은 그의 죽은 뒤였습니다. 인조는 소현세자 부인인 강 씨를 아무 증거 없이 인조 자신이 먹는 전복죽에 독을 넣어다고 주장하여 며느리인 강씨를 사형시킵니다. 대신들은 사건의 조사를 하자고 하지만 인조는 사건조사 없이 무조건 며느리가 범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소현세자인 어린 아들 셋을 제주도로 유배시킵니다, 대신들은 어린것들이 무슨 죄냐며 말리지만 이 또한 인조의 고집으로 유배 보냅니다. 결국 소현세자 큰아들과 작은 아들은 제주도에서 얼마 안돼서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납니다.
소현세자와 그의 가족의 비극은 지금도 참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6. 소현세자의 죽음이 정말로 안타까운 이유.
소현세자는 청나라 볼모로 잡혀있으면서 그곳에서 많은 경험으로 조선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더 이상 굴욕적인 역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을까요, 심양관을 운영하면서 소현세자는 돈이 나라의 군력에 얼마나 중요한지도 느껴을 것입니다. 소현세자가 인조가 죽은 후 왕이 되었다면 그런 경험으로 유교적인 사상은 변화를 못 시킬 수 있으나 과학적 기술이나 무역쪽로 조선의 경제를 부흥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고립된 정책을 펼쳐나가는데 소현세자였다면 고립된 정책보다는 좀 더 조선의 이익이 되는 정책을 펼쳐나가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조 이후 왕들이 조선을 고립되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그렇게 안타깝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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