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숙종 노장 송시열을 누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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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어린 숙종 노장 송시열을 누르다

by 5914 2024.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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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 속종하면 장희빈남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왕입니다. 이 글은 숙종과 장희빈 이야기보다   만 12세에 왕이 되어서 40년 넘게 왕권을 지킨 숙종의 이야기입니다.

1.14세에  왕이 되다.

숙종은 1661년에  태어나 1674년  만 12세 나이에  왕으로 즉위해서 1720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숙종은 무려 4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숙종 하면  당파를 계속 바꾸는 환국정치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킨 왕이었습니다.
만 12세면  아직 성인이  아니어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수렴청정을 해  어머니나 할머니가 나라를 다스려을 텐데  그러나 숙종은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직접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만큼 숙종은  대신들에게  똑똑하고 성숙하다는 것을 인정받아  뜻도 될 것입니다.  숙종은 재위한 지 한 달쯤에  아버지 현종의 일대기를 기록하기 위해 행장을  작성을 하게 합니다. 행장의 내용 중  예송논쟁 중심에  서 있는 송시열에 대한 부분을  좋게 썼는데  숙종은 이 부분을  엄청 화를 내면서  집요하게 송시열이 잘못했다는 이론을 끄집어 내게 합니다..  결국 행장에는 송시열이  예를 잘못 해석했다고 기록으로  남기었습니다.  이 행장을 기록한 인물이 이단하라는 인물로 송시열의 제자였는데  송시열을 비난한 내용이  죄송해서  숙종이 강압적으로 쓰게  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숙종은 이 글을 보고  이단하에게  크게  화를 내면서  "너는  스승만 알고 임금은 모르냐며" 크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어린 숙종은 내가 나이만 어릴 뿐이지  조선의   거장인 송시열도  자신의  신하라는 것을  대신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거 아닐까요~   

2.예송의 논쟁

예송이라는 것은 조선시대의 장례에  예절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이 논쟁의 시작은 효종이 사망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몇년 입느냐를 갖고 서인인 송시열과 남인인 허목이 치열하게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은 효종은 왕이긴 하나  아버지 인조에 둘째 아들이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1년만 상복을 입으면 된다는 것이고 허목은 둘째 아들이긴 하나 효종은 왕이므로 3년을 입는 게 맞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상복을 몇 년 입는 것이 뭐가 중요하길래   당파의 우두머리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논쟁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겠지만 이 논쟁의 내면에는 왕권과 신권의  논쟁이고  서인과 남인의 당파의 기싸움입니다. 송시열이 주장하는 1년 상복은 주자가례에 따라 장남이 죽으면 어머니는 3년 차남이 죽으면 1년만 상복을 입게 되어 있습니다. 이 예법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따라던 예법인데  송시열은 왕도 똑같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왕의 권위를 끓어 내리는 것입니다.  허목은 주례, 예기의 근거로 왕이 어찌 사대부들과 같으냐며 비록 효종이 둘째이기 하지만 왕이므로 3년을 입어야 한다는  왕의 권위를  높여주는 주장입니다.  결국 현종은  송시열의 주장이 받아들여  자의대비는 1년만  상복을 입게 하였습니다.  이때 조선은 서인들의 세력이 더 컸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15년 뒤  예송논쟁이 또 일어나는데  이번에는 효종의 부인이자 자의대비 며느리가 사망을 하고 맙니다.
같은 주제로 논쟁이 일어나는데  서인은 차남의 며느리니까 9개월만 입어야 하고  남인은  왕의 부인이 였으니 1년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1차 논쟁 때는 현종이  왕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서인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이번 예송논쟁은 남인의 편을 들어주어 자의대비는 1년간 상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남인의 세력이 더 컸다는 증거입니다.

3. 조선의 거장 송시열은 누구?

송시열은 1607년에  태어나 1689년  만 81세나이에 사약을 먹고  생을 마감합니다.  당시 그의 죽음에서도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사약을 먹으라는 어명을 듣고 의연하게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와  그 반대로  안 먹겠다면  대짜로 누워  버티다가  강제로 먹여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처럼 송시열의 기록은  상반대 기록들이  많은  인물입니다. 송시열은 성리학자의 대가로 조선의 왕 효종과 현종의  스승인 만큼  당대 지식인으로 최고인 인물이고  벼슬은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조정안에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높은 위치를 차지한  사람들이  많아서  송시열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인조 효종, 현종, 숙종까지  네 명이 왕을  모시었고 효종 때는 효종과 북벌정책을  피기도 했습니다.  송시열은  멸망한 명나라를 추앙했고  막강해져 가는 청나라를 무식한 오랑캐라면서 무시하였습니다.  명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유교국가로 우리 조선이 그 뜻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청나라는  군사적 힘만 크지  그들에게는 학문도 없고 문화도 없고 또  병자호란 때  우리에게 큰 아픔과 수치심을 준 나라로 청나라를 적대시하였습니다. 송시열은   주자를 바탕으로 한  유교적 사상을 조선에  심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고  그 덕분에  조선을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버립니다.  물론 한 사람의  생각으로  조선 전체가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지만  송시열의  깨어있는 지식이었다면  조선의  백성들도  어느 정도는  따르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송시열은 무엇가  깨우침을 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대 서인의  수장이었을 만큼  그를 따르는 지식인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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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숙종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다.

숙종은  재위 10년 이상이 지나도  후사가 없었습니다.  첫번째 부인인 인경왕후 처연두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두 번째 부인인 인현왕후 사이에서도 후사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 숙종은 장희빈을  만나  그들 사이에서 아들을 보게 됩니다.  이 아이가 훗날 경종입니다.  숙종은 아이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원자로 책봉합니다.  원자로 책봉한다는 것은  나중에  세자로 책봉한다는 뜻으로 서인들과 서인의  송시열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인현왕후가 아직 젊은데  어찌 후궁에 자식을  세자로 삼느냐는 내용입니다.  왕의  정통성이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숙종은  송시열의 계속 반대하는 상소 때문에 결국 송시열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이때 송시열의 나이 81세의 나이였습니다.
숙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번째 환국인 1689년  기사환국을  합니다.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서인들을 내쫓고 다시 남인의 세력을 밀어주었습니다.  이때 희생양이 된 인현왕후는 폐위가 되고 장희빈이  그 자리를 차지해  왕비가 되어 버렸습니다. 송시열은 기사환국으로 국문을 받으러 올라오는 길에  숙종이  사약을 내려  죽입니다.
사람들은 왜  인현왕후를 폐위까지 시켜을까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마  장희빈의 아들 때문일 것입니다.
엄마가 왕비여야지  훗날  왕의 정통성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숙종은 5년 뒤 3번째 갑술환국으로  장희빈을 다시 빈으로 명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킵니다.  아마 장희빈뿐만 아니라 남인의 세력들이  마음에 안 들나 봅니다. 이때  서인에서 갈라진 소론이 집권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후궁을  왕비로  삼지 말라는 것을  법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숙종의  재위기간이 긴 만큼  병자호란으로  호란스러웠던 시기를 어느 정도 정비한  왕이었습니다.  광해군 시절부터 실행한 대동법도  완성하고  조선의 화폐 상평통보도 만들었고  국방에도 힘을 써  북한산성도  수축하였습니다. 외세 침탈을 만기 위해 해안을 따라 설치한 돈대도 만들었습니다.  특히 순종은  이순신장군을 모시는 사당 현충사도  만들었습니다,  또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왕으로 복위시킵니다.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 씨도 다시  복위시켜줍니다.  
숙종은 치열한 당파 싸움을 이용해  자신의  왕권을 더욱 강화시킨  냉정한  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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