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조 병자호란에서 치욕를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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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인조 병자호란에서 치욕를 당하다

by 5914 2024.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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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된 인물입니다.  그러나 왕이 되어기에 조선의 왕으로  가장 큰 수치스러운 치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 글은 인조를 통해 조선의 비극인 병자호란을 알아볼까 합니다.

1. 광해군을 쫒아내다.

광해군은  자신의 친형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하여  유배지에서  죽게 하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서궁에  감금시키는 불효하였고 ,명나라에  충성를 다해야 하는  조선인데  광해군은  그리하지 않고  명나라와  후금의 중립외교을  하는것은  명나라의 불충이라는 것,  궁을  짓는다는 이유로 무리한 토목공사로  국가의 재정을 바닥을 냈고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등으로  인조는 36가지의  죄목의 명분을 만들어  광해군을  폐위 시키고  유배를 보냅니다. 효과 충을  하지 않다는 명분으로 결국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2. 인조는 왕이  되었지만~

인조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나라의  안정을  위해  한  정책들은  새로운 것보다  대부분 광해군이  해왔던 정책들로  꾸려나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새로운 군주의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인조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인조 마음처럼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내국에서  크고  작은  난이 일어나  인조의  왕의  자리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대표적인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괄은  한양도성까지 점령해서 인조가  궁을 버리고 도망까지 가버리는 난입니다.  결국  이괄의 난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후유증으로  조선의  국방이  약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이괄이라는 사람이 조선의  북방을  지키는데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이괄은  난을 일으켜서  죽었고 그리고  지방에서  군사 훈련을  하는 것이  인조에게는  난을 일으키려는 계략이라 생각해  군사훈련 또한  소극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인조 5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입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났습니다. 후금의 조선을  침략한 명분은 명나라와  화친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조선의  외교정책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침략했다는 명분입니다.  후금이  이 명분하나로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겠지만  우리 조선을  침공한  명분입니다.  결국  빠르게  쳐들어오는 후금은  제대로 방어하지 못해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후금은  명나라와 관계를 끝고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자는 화친을 보냅니다. 이 화친으로 조선의  내에서는 후금을  배척해야 한다는 척화파과  전쟁을  피하기 위해  후금과  화해해야 한다는 주화파이  크게 대립합니다. 후금이  뒤로 한발 물러나 명나라의  관계를 유지하되  후금과는 형제관계로  화친을 하자는 조건을  냅니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이 조건을 받아들여  후금방식으로  조선이 굴복한  정묘맹약을 합니다. 인조는 쇠퇴하고 있는 명나라 보다  후금과 더 가까운 외교를 하여야만  하지만  자신이  그런  정책을  펼치면  광해군을  쫓아냈던  명분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명나라를  멀리하는 것은 그 당시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불효와 불충을  동시에  행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3. 그리고 9년 뒤 병자호란시작되다. 

1636년 후금은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게  됩니다  당시 왕이었던 홍타이지는 자신을  황제라고 명칭을  정했습니다.  청나라는 황제라는 호칭을 정할 만큼  나라의  힘이 이전보다 세력이 더 커졌다는 애기도 됩니다.  청나라는 조선에게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바꾸자는 요구를 해옵니다,  다시 말해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에게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이때  조선의  사신들이  홍타이지 황제등극식에서  절을 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신들도 나름 이유가  있어겠지만  홍타이지는 사신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지만 아마 모욕감을  크게  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돌아와  조선은 청나라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결국  청나라는 1636년 추운 겨울에  기마병으로  얼어붙은 압록강을  돌진해서  쳐들어 옵니다.  조선도  대비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무요지물과  다름없었습니다.  엄청 빠른 속도로  돌진하고 있어서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 가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여서  남한산성으로  도망갑니다. 이렇게 열심히  도망 다녔던 왕이  또  있을까요~ 병자호란은  홍타이지가  직접 끌고 내려왔습니다. 한 겨울에  남한산성 안에 갇혀버린  인조에게  홍타이지는 계속 항복하라고  요구를 하지만  인조는 쉽게 항복하지 못합니다.  항복을  한다고 해도  백성들과  자식들 그리고  대신들 앞에서의  치욕당해 야만 하고  또한  자신의  안위가  보장이 된다는 법도  .  그러나  추운 한파와  식량부족  청나라의  연속적인 압박으로 인조는 항복하게 됩니다

4. 삼배구두례

삼배구두례는 것은  신하의 나라가 큰 나라를 만났을 때  행하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으로 항복의식입니다. 우리에게는 치욕스러운 단어이기도하죠.   인조가  항복을 하자 홍타이지는 삼전도로 와서  삼배구두례를 하라고 명합니다.  왕의 옷이 아닌  서민의  옷을 입어야 하고  산성에서 나올때는 죄인 이므로  정문이 아닌  서쪽의  서문으로  나오게 명하였습니다.  삼전도는 지금의  잠실 L타워  맞은편에  있는  위치입니다,  인조는  홍타이지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행동을  온 백성이  보고 있는 앞에서  행하고 말았습니다. 추운 겨울  땅바닥에  이마에서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는 인조의  치욕적인 감정은  조선의  백성들도  같이 느꼈을 겁니다. 
그러나  그냥  치욕적인 감정만  느껴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전쟁에서  패배한  조선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5. 병자호란의  항복한 이후

인조의  항복으로  청나라는 조선에게  어마어마 한  조건들을  청의 신하의 나라로서  예를 다할 것, 왕의  장자와 제의 2자를 대신해서 인조의 자녀들을  인질로 보낼 것, 명을 공격할 때  조선의 원군을  파견할 것, 성곽수리 와 중축은 허락을 받을 것, 금천냥과 백은 천양을 비롯한 20여 종을  세폐로 받칠 것 등  조선에게  엄청 불리한 조건들을  청나라는  요구했습니다.
이때  조선의 백성들은  청나라에  끌려가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돼버립니다.  청나라에서 도망쳐서 잡히면  다시는 못 도망치게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도  백성들을  감래 해야만 했습니다.  조선의  여인들인  청나라의 첩으로 팔려가  본처에게  확대당하는 고충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청나라에서  간신히 조선의 돌아온  아픔이 많은 여인들을  몸을 더럽힌 화양년이라 하여  마을에서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병자호란으로  받은  스트레스와  분노들을  사회적으로 약한 여인들에게  표출한 것  아니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 합니다.
병자호란은  인조에게  치욕적인 일이겠지만  병자호란을  당한 백성들에게  엄청난 비극을  맞게 된  일입니다.  물론 인조도 자식들을 볼모로  끌려가게 했지만  그래도 백성들이 당한 고통만큼 될까요~ 
역사에서  만약은  없지만  그냥  광해군이  유지했다면  적어도 인조는 그런 치욕을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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