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시절 임진왜란 때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조선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한 광해군이 왜 왕이 되어서는 백성을 힘들게 하는 폭군이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1. 광해군 임진왜란 때문에 세자로 책봉되다.
광해군은 1575년에 아버지 선조와 후궁인 공비 김 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선조는 광해군을 애초에 세자를 삼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선조의 마음에는 자신의 후계자는 후궁이 아닌 정비인 의인왕후 사이에서 나은 아들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의인왕후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조는 누굴 세자로 정할 것인지 계속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선조는 어쩔 수 없이 세자를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세자가 없는 상태로 자신이 혹 세상을 떠나면 전쟁 시 나라는 더 혼란스러운 것은 뻔한 일이라는 것을 선조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선조의 여러 아들 중 광해군이 총명했는지 광해군은 둘째였는데도 세자로 책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선조는 명나라에 도움을 청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어린 세자인 광해군에게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조선을 수습하라며 분조를 발표합니다. 분조는 세자와 왕이 나라를 나누어 다스린다는 뜻으로 선조가 수습해야 할 일을 18살뿐이 안된 세자에게 미루어버린 것입니다.
2. 광해군 백성을 위해 싸워지만
광해군은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고 자기 자신은 세자가 되어있고 왕을 대신해 나라의 민심을 다스려야 했던 16살의 광해군은 황당하고 망망했을 텐데 그래도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해 전란을 착츱 수습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민심을 돌보아 백성들에게 신망과 지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군신관계인 조선과 명나라는 광해군이 둘째라는 이유로 세자 승인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조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광해군을 세자자리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선조는 인의왕후가 죽자 어린 인목왕후를 새 부인으로 맞아들입니다. 몇 년 뒤 그사이에 낳은 정통인 영창대군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들이 광해군은 지금은 세자로 있지먄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는 아주 불안한 위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왕이 될 운명인지 선조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서 영창대군이 2살 무렴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왕으로 임명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간신히 왕이 되었지만 광해군은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3, 그래도 증위초기에는 백성을 보살피다.
광해군이 처음부터 폭군은 아니었습니다. 외교정책도 어느 왕들보다 뛰어났다고 평가받는 왕이었습니다.
광해군의 가장 큰 업적인 대동법도 있습니다.
대동법을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예전에는 나라에서 세금을 지역 특산물로 받았지만 대동법에서는 지역 특산물 대신 쌀로 통일해서 받았습니다. 토지를 많이 같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제도였습니다. 토지들이야 양반들이나 지주들이 많이 같고 있으므로 서민들에게는 옛 조세제도보다는 훨씬 좋은 법이었습니다.
외교정책에서는 당시 명나라는 점점 망해가는 나라였고 후금은 여진족인 건국한 나라로 점점 힘이 커지는 나라였습니다. 조선의 대신들은 후금을 베제하고 명나라를 형제의 나라이므로 명나라의 외교를 충실히 하기를 원했지만 광해군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후금을 예외중시 하면서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립외교를 지켜나가면서 나라의 안정을 최우선했습니다.
4. 광해군 효심과 충심을 버리다.
1608년에 왕이 되었지만 명나라에서 광해군을 조선의 왕으로 인정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선조의 첫째인 광해군의 형 임해군이 있는데 어찌하여 광해군이 왕이 될 수 있느냐면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명나라나 조선은 왕의 계승은 장자계승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광해군이 왕이 되는 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명나라는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임해군은 행실이 바르지 안 하고 성품이 좋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조정의 대신들은 임해군이 사병을 양성해 반역을 꾀한다며 앰해군을 처형을 할 것을 광해군에게 처합니다. 광해군은 임해군을 죽이지는 않고 교동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그리고 임해군은 유배지에서 의문사를 당하나 광해군은 조사하지 않습니다.
임해군이 죽음으로써 광해군은 명나라에게 조선의 왕임을 승인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612년에 인목대비인 아버지 김제남이 연모를 꾀한다는 말이 광해군 귀에 들어왔고 이 무렵 이목대비는 의인왕후 능에서 저주를 조작했다는 애기도 있었습니다. 광해군을 김제남의 역모설로 인목대비인 아버지 김제남과 그의 아들들을 사사하고 그의 가문을 멸문시킵니다. 그리고 눈에 가시였던 연창대군을 강화로 유배 보냅니다. 얼마 후 영창대군을 유배지에서 방안에 가두어 장작불을 지펴서 죽입니다. 그때 영창대군 나이 9살이었습니다.
광해군은 9살 어린 어머니 격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서궁에 유배시켰습니다. 광해군의 처사는 조선의 왕이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대신들과 백성들은 몹시 당황스럽지 않았을까요~
당시 명나라는 금나라와 계속 전쟁 중이었습니다. 명나라는 조선에게 군을 보내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광해군은 계속 미루다가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보내지만 두 번째 명나라에서 군사를 청했을 때는 단혹하게 거절을 합니다.
대신들은 명나라에 충심을 보여야 한다면서 군사를 보낼 것을 간절하게 광해군에게 얘기했지만 광해군은 명나라에 충심을 버렸습니다. 유교사상이 깊은 대신들은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하고 충심을 버리는 왕을 내버려 둘리가 없습니다.
5. 무리한 궁궐 복원 공사
광해군은 임해군이 죽고 영창대군이 없는 데도 아직도 왕의 자리가 불안했는지 풍수지리에 빠져버립니다.
잔잔한 미신과 풍수지리에 믿기 시작하더니 어느 술사가 어느터를 지목하면서 그터에 왕의 기운이 보이니 궁을 지어서 기를 눌러야 한다고 해서 그 자리에 궁을 지었습니다.
광해군은 여러 개의 궁을 복원하려고 했습니다. 공사를 한다는 것은 많은 자금과 백성들의 피와 땀이 들어가는
것인데 전쟁 회복이 아직 안돼 조선에서는 백성들의 고통을 한 측 더 높이는 것입니다.
6. 결국 폐위되다.
광해군이 아끼던 한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으로 폐위의 길을 가게 됩니다.
광해군의 힘을 업고서는 권력을 남용해 재산을 축적한 여인입니다. 이름은 김개시라고 광해군이 어린 시절부터 광해를 돌봐준 상궁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정치말년에 김개시의 말만 들었던 거 같습니다. 역모가 일어날 거라고 대신들이 얘기 해주었는데도 김개시가 그럴 리 없다는 말에 안심했다는 애기도 있습니다.
광해군의 측근들의 권력남용으로 백성들의 삶은 황폐해졌으므로 이를 방치한 광해는 폭군이 되어버렸습니다.
1623년 인종반정이 일어나서 광해군은 폐위가 되어 강화도에 유배됩니다. 나중에는 제주도에 유배되는데 19년에 유배생활 끝으로 1641년 그의 나이 67세에 사망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광해군은 좋은 왕이 되려고 노력을 했으나 선조와 측근들에게 받은 마음의 고통들이 너무 커서 결국은 초심을 잃고 자신도 모르게 폭군이 되어버린 것 아닐까요~
광해군을 이해하고픈 마음은 없지만 광해가 안쓰럽다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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