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의 사랑만 믿었던 악녀 장희빈 결국 숙종에게 버림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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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숙종의 사랑만 믿었던 악녀 장희빈 결국 숙종에게 버림받다

by 5914 2024.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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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실록에도 기록되었을 만큼 장희빈의 외모는 그 시대에는 매우 아름다웠던 여인입니다.
어린 나이에 궁녀로 들어와 숙종의 사랑으로  왕후까지 되었지만 그녀의 끝은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1. 서인. 남인.  그리고 숙종

장희빈에게 사랑을  주었던 사람이 조선의 왕 숙종이므로   당시 정치적 배경과 장희빈을 분리해서 이야기를 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당시 조선을 집권했던 당파는 서인과 남인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서인의 세력이 커지면 남인의 세력이 약해지고 남인의 세력이 커지는 반대로 서인이 약해지는 구조였습니다.  그 사이에서 숙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숙종은 환국정책을 펴서 서인세력과 남인세력의  반복적으로 교체시키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건하게 한 왕이었습니다.
숙종의 여인 하면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대표적입니다.  인현왕후는 인현왕후의 아버지가 서인의 중심세력의 사람이었고 장희빈은 그녀의 숙부가 남인들과의 밀착관계가 있어서 따라서 장희빈도  남인 세력과 밀착관계가 있었습니다. 
이 두여인의 대립관계가 정치적인 대립관계와도 연계가 되어버립니다.

2. 장희빈 궁녀가 되다.

그녀의 이름은 장옥정입니다.  장희빈은 이름이  아니라  장은 그녀의 성씨이고 희빈 중  "빈"이라는 것은 후궁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여인에게 붙여주는 명칭입니다. 그러므로 장희빈은 죽기 직전에도 후궁 중 서열 1위 위치에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중인 출신으로 집안으로 아버지는 역관(통역사) 출신으로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장희빈이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으로 집안의 가세가 어려워지지만 그녀의 숙부인 장현의 보살핌으로 생활은 궁핍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생활이 어려워 궁녀가 된다는 설과 숙부인 장현이 의도적으로 장희빈을  숙종의 여인을 만들 계획으로  궁에 입성시켰다는  설도 있습니다.  
 여하튼 장희빈은 어린 나이에 궁녀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외모는 시간이  흐를수록  무르익어 갔습니다.
그녀의 나이 22살에 숙종 눈에 들어 결국 장희빈은 승은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젠 장희빈은 숙종의 여인이 된 것입니다.  당시 숙종은 첫 번째 부인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숙종의 나이도 20살이어서 숙종과 장희빈의 사랑은 한없이 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이 둘의 사랑을 방해합니다.  장희빈의 성품이 간산하고 악독하여   만약에 왕을 꾀하면  국가의 화가 이루 말할 수없다는 이유로 장희빈을 궁 밖으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아무리  왕의 어머니라고 해도 아들의 여자를 궁으로 내쫓은 것은 큰 무리수 일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아들 숙종과 사이도 나빠질 수 있을 텐데 왜 명성왕후는 중인 출신인 장희빈을 쫓아냈을까요? 아마도 그녀의 배후에는 남인 출신들이 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명성왕후도 서인 집안의 딸로 남인들을 경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환국정책이라는 게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귀향을 가며 또 집안 자체가 풍비박산이  일어나는 때문에 어떻게든 정권을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숙종이 남인과  연줄이 있는 장희빈에게 마음이 가고 있으니 명성왕후는 싹을 잘라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결국 장희빈을 궁에서 쫓겨나 숙종과 이별을 하게 됩니다.

3. 장희빈 궁으로 다시 돌아오다

장희빈이 궁 밖으로 쫓겨난 뒤 숙종은 1681년  두 번째 부인인 인현왕후와 혼례를 올립니다. 인현왕후는 서인 집안의 딸로 서인들의 입지는 더 굳건해졌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인현왕후에게는 후사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명성왕후도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인현왕후는 5년이 지나도 후사가 없자 숙종이 총애했던 장희빈을 다시 궁으로  불려 들일 것을 숙종에게 청 합니다.
반대가 심했던 명성왕후가 사라진 지금  부인인 인현왕후가  먼저 장희빈을 궁으로 들일라고 하니 숙종은  얼른 장희빈을 궁으로 불러들입니다. 
이때부터 숙종의 총애는  끝이 없었으므로 장희빈의 세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를 믿고 인현왕후를  무시하는 교만한 태도까지 보여  결국 인현왕후는 훈계 차원에서 장희빈을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이 사건 이후  장희빈에게 숙원이라는  품계와 직책을 내립니다. 정식 후궁으로 신분 상승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노비 100명이라는 선물을 해주었습니다.  시간이 거듭되면서 숙종의 총애는 장희빈에게 집중이 되면서  그녀의 직책을 계속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훗 날 경종이 되는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장희빈의 경계대상인 인현왕후는 아직까지 후사가 없었으니  완전 그녀의 세상이었습니다.
숙종에게는  첫아들이어서 귀하게 여겼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에게  최고의 품계인 "빈"을 내려주면서  우리가 아는 장희빈이  되었습니다. 
숙종은 100일도 안된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아 후계자로 삼겠다고 선언합니다.  대신들은 인현왕후가  아직 젊은데  후사를 기다려야 한다면서 반대를 하지만 숙종은 결국 장희빈의 아들을 후계자로 정합니다.
그리고 숙종은 장희빈을  왕후에 올리기 위해  인현왕후의 허물을 만들어서 폐위시켜 버립니다.  인현왕후는 궁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장희빈은 바로 왕비가  되었습니다. 숙종의 총애의 끝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인현왕후 폐위와 원자 책봉을 반대한 서인들을 숙청하여 서인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남인들을  앉혔습니다.  이 사건이 숙종의 2번째 환국인  기사환국입니다.
숙종의 사랑으로  장희빈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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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숙종의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었나 보다

영원한 줄 알았던 사랑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숙종에게  새로운 여인이 나타났고 또 장희빈 오빠인 장희재의 부정부패사건들이 드러났으며   그리고  숙종을 실망시키는 남인들  이 모든 것이 장희빈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장희빈은 숙종의 새로운 여인인 숙빈최 씨에게 대놓고 질투해  숙종의 화를 북돋았고 그런 장희빈을 보면서 인현왕후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런 와중 서인과남인은 서로 역모를 꾀했다면서  비방을 하였습니다.  숙종은  3번째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를 5년 만에 복위시키고  장희빈을 중전자리에서  희빈으로 강등시킵니다.  또 정권을 잡고 있는 낭인들을 물러나게 하고 귀향을 보낸 서인들을 다시 복위시킵니다.  갑술환국 이후 숙종은 장희빈에 대한 사랑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4. 인현왕후가 죽었을 뿐인데

인현왕후는 폐위기간에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몸이 많이 허약해졌습니다. 복위되어도 인현왕후의 건강은 쉽사리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1701년 인현왕후는 복위한 지 7년 만에 후사도 없이 35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숙종의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숙종의 새로운 여인이었던 숙빈 최 씨에게  장희빈이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서 인현왕후를 저주했었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숙종은 바로 장희빈 처소에 가 신당과  저주를 품은 물품들을 확인하고서는 엄청나게 분노합니다.
원래 왕실의 여인은 이런 무속적인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에게 자살을 명 하였으나  장희빈은  거부합니다.  결국  숙종은 사약을 내려 그녀에게 억지로 사약을 먹게 하여 죽이고 맙니다.  
이때  조정의 대신들은 장희빈을 죽이는 것에 대해 엄청나게 반대를 합니다.  훗날 왕이 될 어머니를 죽이는 것을   대신들의 부담감은 엄청난 것이어서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궁 안에 신당을 차리는 것은 엄청난 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죽을죄는 아니었습니다. 
숙종은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장희빈이 자신이 버렸었던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비정하게  죽였습니다.
장희빈이 악녀인지는 모르겠지만 숙종이라는 남자를  잘 몰랐던 여인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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