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의 두명의 왕후와 후궁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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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영조의 두명의 왕후와 후궁들의 이야기

by 5914 2024.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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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재임기간만 50년이 넘은 왕으로 2명의 왕후와  4명의 후궁이 있었습니다.
가족들을  편파적으로 대한 영조는 그의 여인들은 어떻게 대했는지 그녀들의 일생은 어떤지를 알아보겠습니다.

1. 정성왕후는 영조의 외면으로  외롭게 살다 외롭게 돌아가시다.

그녀는 달성부원군의 딸로 1693년에 태어납니다. 13세때에 두 살이 어린 연잉군(영조)과  혼례를 합니다. 
당시 영조는 연잉군라는 칭호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어린나이에 혼례를 한 부부들은 웬만해서는 사이가 좋은 편인데  이상하게도  영조는  연잉군시절부터 정성왕후를  싫어했습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자면  둘의 첫날밤에 영조가 정성왕후의 손을 보면서 손이 이쁘다며 칭찬을 해주었는데  정성왕후가 원래 양반의 딸로 태어나서 고생을 안 해서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영조는 그 대답이 무수리 출신인 자신의 어머니를 비하했다고 받아들여 그 후 정성왕후를 외면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야기는 영조의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얼마나 심했는지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아니면 정성왕후의 조카인 서덕수가  영조가 세제시절 왕으로 추대하려다가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 때므ㅡㄴ에 영조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정성왕후를 외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영조가 왕이 되어서는자신은 경희궁에서 생활을 하고 정성왕후는 창덕궁에서 생활하게 했습니다.
부부일이야 남들은 모르지만  영조는 정성왕후를 대 놓고 외면했으니 정성왕후의 마음과 그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이가 안 좋으니 당연히 후사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정성왕후는 왕실의 주인으로 본인의 역할은 충실이 하였습니다. 자신을 외면한 영조도 잘 모시려고  노력했고  왕실의  어른인 인원왕후와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 씨도 잘 모셨으며 영조의 후궁들과도 큰 갈등 없이  잘 지내었습니다.
훗날 친 자식처럼 생각한  사도세자를  영조와 갈등이 있을때마다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노력도 하셨고 사도세자의 친모와 같이  애타는 마음으로 두부자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영조 또한 정성왕후가 왕실의 여인으로서 흠이 없다는 걸 인정을 해주었지만 마음은 끝까지 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50이 넘으면서  병이 생기기 시작했고 의관들이 그녀의 병세를 영조에게 알리면 꾀병이라면서  냉정하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나이 60이 돌아와 대신들이 환갑잔치을 열어주자고 하지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757년 그녀의 나이 64세에 사망을 하였습니다. 영조는 마지막까지 정성왕후를 외면하였습니다. 정성왕후가 죽은 날  자신이 사랑하는 딸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도 죽었는데 영조는 딸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국모의 장례식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무릅쓰고 사위에 장례식장에 갔던 것입니다.
그녀는 죽음에서 까지 영조의  외면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영조가 무슨 이유로 그녀를 외면 했는지는 모르지만 한 여인에게 참으로 몹쓸 짓을 한 것입니다.
그래도 영조는 정성왕후 옆에 자신의 무덤 자리를 만들었는데 영조가 사망 한 뒤 그녀 옆자리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오늘날 까지 큰 무덤 속에 홀로 누워있습니다.

2. 정순  왕후가  가질수 있는 것  권력뿐이었다

정순왕후는 1745년에 태어나 15세에 영조의 부인으로 간택되어서 왕실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영조의 나이 66세이고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보다 10살이 더 어렸습니다. 정조와도 7살 차이가 났습니다. 정순왕후는 어린 나이에 왕실의  새 주인이자 왕실의 어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영조는 왜 이 어린 여인을 굳이 부인 으로 들려야만 했을까요~ 이유를 들자면  영조 아버지 숙종이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법을 만들어버려서 영조도 정말 어쩔 수 없이  어린 정순왕후를  자신의 부인으로 들여야 했습니다.
영조는 어린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그녀를  정성스럽게 대해 주었습니다.  정순왕후도 그런 영조의  마음을 알고  예의를 다해 영조를 대하였지만 이 둘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습니다.
의외로 그녀는 왕실의 주인의 역할도  잘 익혀나가고 있었지만 사도세자가 귀주안에서 죽는 임오화변에서는  왕후로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궁에 들어온지 3년 정도였고 그녀가 들어와 있을 때는 이미 두 부자간의 갈등이  끝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영조의 보호아래 조용히 자신의  힘을 키워 나갔으며 그녀의 친정 오빠인  김귀주와 경주김 씨 가문도 권세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영조가 죽고  그의 손자인 정조가 왕이 되었고 정순왕후는 대비가 되었습니다.   정조가 세손때부터 정순왕후의 집안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서 정조와 정순왕후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순왕후 오빠인 김귀주가 혜경궁 홍씨의 무안인사를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조는 그를 유배를 보냈고 얼마뒤 김귀주는 유배지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이 사건 이후로  정순왕후와 정조의 사이는 멀어집니다.   사적으로는 서로 예의를 다해 챙겨주었다고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정순왕후는 정조의  행보에 방해를 했습니다.
정순왕후 보다 정조가 먼저죽음으로써 그녀는 대왕대비가 되고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합니다.
정조가 만들었던 장용역을 페지하고 규장각을 축소했으며 혜경궁 홍 씨의 동생인 홍낙임을 처형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정조가 키웠던 남인세력과 소론 그리고 노론들을 숙청하기 위해 정조가  눈 감아주었던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신유박해를 일으켰습니다.
이때 정약용, 정약종, 정약정등이 귀양을 가거나 처형당했습니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배척한  노론벽파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와 자신의 권력을 휘둘렸습니다.
그러나 순조가  성장을 하면서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에서 물러나야 했고  수렴청정이 끝나면서 그녀의 권세도 점점 시들어 버렸습니다.  노론 벽파는 순조의 장인으로 인해 숙청되었습니다.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으면서 그녀의  왕실에서 조용히 사는 신세가 되고 1805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가져던 권력은  그녀의 인생에 비해 너무나도  짧았습니다.

3. 영조가 처음으로 마음을 준 여인 정빈 이 씨

정빈 이 씨는 어린 나이에 궁녀가 되었습니다.  영조가  어린 시절 궁에 있을 때 정빈이 씨를 알고 지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영조가 왕이 되기 전에 얻은 후궁입니다. 그녀는 28살에 갑작스러게 사망하고 맙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독살설이 있지만  기록으로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영조는 그녀의 죽음으로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2년 뒤 또 다른 후궁을 맞이하게 됩니다.

정빈 이 씨는  10세에 사망한  효장세자와  화순옹주의 어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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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빈 이 씨는 영조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녀의 자식들은~

영빈 이 씨도 어린 시절부터 궁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깊은 성품과 총명함은  영조의 아버지 숙종도 칭찬한 적도 있습니다. 

영빈 이 씨는 궁녀 시절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잘 하는 궁녀여서   대전이나 대비전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의외로 영빈 이씨는 30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영조의 승은을 입게 됩니다. 아마도 영조가 예전부터 눈여겨보았지만 윗전의 궁녀이므로 눈치를 보다가 그녀가 30세가 되어서야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영조는 영빈이 씨에 대한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  그녀의 지위가 숙의에서 귀인을 거쳐 영빈이 되기까지 2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영빈은 영조의  기대와 달리 내리 딸만 낳았지만 영조의 총애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 나이 39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사도세자입니다.  그녀는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그리고 사도세자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영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성품이 온화하여  인원왕후와 정성왕후를 잘 모시어 그들 사이에 큰 갈등 없이 잘 지내지만 영조가 병적으로 자식들을 편애하는 것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맛보고 살아야 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한없이 이뻐하는 화평옹주와 화완옹주와는 달리  사도세자와 화협옹주에 대한 미움은 상상초월이었습니다.

결국 그런 미움의 행동이 사도세자의 광증을 만들었고 영빈이 씨는 광증을 보이는 아들 사도 세자를  보고서는  자신 스스로 영조에게  아들을 처분해 달라는 청을 올리는 사건 임오화변이  겪어야만 했습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귀주 안에 넣어 굶겨죽인 사건입니다.  

영빈 이 씨는  사도세자의 아들 어린 정조를 지키기 위해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던 비운의 어머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아들 사도세자 3년상이 끝나는 다음 날 1764년 69세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영조는  거의 본처와 다름이 없었을 만큼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으나  영조는 알고 있을까요 그가 영빈이 씨에게  준 아픔이 

얼마나 작인 한 했으며 벗어날 수 없는 절망감을 안겨주었음을~

5. 정조의 복수로 궁에서 쫓겨난 영조의 마지막 후궁 숙의 문씨

영조의 며느리 현빈조 씨는 39세에 생을 마감하는데 그 장례식에서 며느리 처소에서 일하는 어린 숙의 문 씨를 보고 영조는 한눈에  반합니다.  예를 다하는 유교를 지켜야 하는 왕인 영조는 며느리 상중에도 불구한고 어린 숙의 문 씨와 하룻밤을 보내고 후궁으로 임명해 버립니다.

그녀는 영조의 총애만 믿고서는 궁안에서의 행실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무례함은 영빈 이씨을 우습게 보았고  대들기까지 해 인원왕후에게 회초리까지 맞은 사건도 있었지만  그녀의 행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화령 옹주와 화길 옹주를 낳지만 그녀의 생각으로 자신이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지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이간질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도세자의 광적인 행동들을 영조에게 살짝살짝 알게 하여 그들의 관계의  더 악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성공을 하였지만 그녀의 꿈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영조의 아들을 못 낳기 때문에 그녀의 노력은 허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숙의 문 씨는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왕으로 오른 뒤 바로 정조의 복수의 대상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정조는 왕이 대자마자 첫마디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입니다. 이 한마디에  공포심을 느껴던 사람들은 엄청 많았을 것입니다. 그중의 숙의 문씨도 포함되었을 것 입니다.

정조는 숙의 문 씨의 작호를 삭탈하고 사제에 가두었습니다. 그의 오빠 문성국과 어미는 노비로 만들었습니다.

정조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복수의 시작의 표본으로 숙의 문씨만큼 좋은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숙의 문씨는 정조의 명으로 1776년 8월에 사약을 받고 죽고 맙니다.

 

영조에게 귀인 조씨라는 여인이 있었으나 영조가 그녀를 어떻게 대하였는지는 기록이 거의 없어 이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귀인 조씨는 화유 옹주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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