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문귀신 친일경찰 노덕술은 이승만 정부에게 단죄가 아닌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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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고문귀신 친일경찰 노덕술은 이승만 정부에게 단죄가 아닌 훈장을 받았다

by 5914 2024.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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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을 일본 경찰보다 더 심하게 고문하였던 같은 민족인 악질 친일파 노덕술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1. 일본 앞잡이 노덕술

그는 1899년  울산 어느 지역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는 울산 보통학교 2하년에 중퇴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는 상점 같은 데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해봤자 별 볼 일 없음을 깨닫고 1918년에 귀국해 일본 경찰이 되기 위해 순사교습소에 들어가 1920년에 일본 말단 경찰이 됩니다.
그는 경찰이 된 후 승승장구를 하는데 1921순사부장, 1933년 경부(현, 경감) 1943년 경시로 승진하는데  이 자리에 오른 조선인 중에 21명뿐이며  노덕술을 제외한 조선인들은 좋은 집안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일본인들도 쉽게 오를 수 없는 자리였는데 말단 경찰이 그 자리에 까지 올랐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노덕술에게 잔인한 고문으로 고통을 받았는지을 반증해주는 것입니다.
1927년 10월 신간현 동래지현 간부 박일향등을 고문했는데  그의 고문으로 독립운동가가 3명이나 생명을 잃었습니다.
1928년에는 부산제2상업학교 비밀 결사대 혁조회 어린 학생간부 9명을 무자비하게 고문하여 그중 3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까지 했습니다.  
노덕술은 새로운 고문들을 스스로 개발해 조선인들을 괴롭혔습니다.  죽기 직전 구타하기는 기본이고  머리카락, 혀, 손발톱, 이빨등을 뽑는 고문도 했고 고춧물 붓기, 대못상자, 전기고문등  일제감점기 시대의 고문기술 가운데 70%가 노덕술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1940년대에는 일본의 물자 수송을 한 공로로 공로상과 훈8등 훈장도 받았습니다
그는 해방직후 평양에서 경찰서장을 하였고 해방후 공산주의 세력에 체포는 되었지만  몇 달 후 풀렸난 다음 바로  남한으로 도망쳤습니다.

2. 노덕술의 고문은 계속되다

노덕술은 해방후 당연히  그 외 죄를 재판을 받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정부 밑에 있는 장택상은  노덕술을 포함해 친일경찰 출신들을 다시 등용해  조선공산당원, 남로당 탄압, 반 이승만세력 탄압에 이용하였습니다.
이승만과 장택상도 일제시대 독립을 외쳤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46년 4월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암살범 한현우 등 일당을 검거하면서 그는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승만에게 반공투사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반 이승만 세력들을 잡아 모진 고문을 했고 당시 좌익세력을 탄압하는데 심혈을 기울었습니다.
노덕술은  의열단 김원봉을 체포해 뺨을 때리는 만행도  저질렀습니다.  이 치욕으로 김원봉은 일제강점기에서도 못느껴던 치욕을 느껴다면서 3일을 울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월북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는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지만 노덕술의 고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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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덕술의 어이없는 재판

 1948년 1월 장택상 피습사건 용의자 25세 박성근은 노덕술의 잔혹한 고문으로 사망을 하고 맙니다. 이때 노덕술은  사건을 숨기기 위해 박성근이 취조한 사이에 도망친 것처럼 꾸미고 시체를 한강에 유기했습니다. 하지만 6개월 후 시신이 물 위로 올라와 노덕술이 고문하여 죽인 것이 밝혀집니다.
노덕술은 체포는 되었지만  장택상의 도움으로 도주하여 은신하게 되었고  그해  박민특위가 출범되었고  도피중이었던 노덕술도 체포되게 됩니다.
체포당시  그가 보유하고 있던 사람 4명이 경찰들이었고 30만원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시세로  따지면 100억의 재산이라고 합니다

체포된 노덕술은 박민특위 관계자 암살까지 모의한  혐의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의 비호를 받아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모든 협의에 무죄를 받았습니다.
그후 석방된 노덕술은 1950년에 육군본분 제1사단 헌병대장(중령)이 되었고 1954년 부산 제2 육군범죄수사단 대장등을 지내다 1955년  겨우 뇌물수뢰 협의로 징역 6월을 받고 파면되었습니다.
그 후 울산으로 내려가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바로 낙선하였습니다,   1968년 68세에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이승만정부로 부터 1950년1951년 화랑무공훈장를 2개를 받고 1953년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정부가 왜 그에게 훈장을 주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다고 합니다. 
이승만 정부는 역사의 오점을 제대로 남겨났습니다.  후손들은 대대로 이승만 정부와 노덕술에 대한 만행을 애기하고 또 기억하고 애기해 줄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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