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을 싫어 했던 여인 친일파 배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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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일제시대

조선을 싫어 했던 여인 친일파 배정자

by 5914 2024.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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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이글에 나오는 여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 들어가 일본을 의해 스파이 노릇을 제대로 한 배정자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 그녀의 성장과정

1870년에 경남김해에서 태어난 배정자는 원래 본명은 배분 남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배지홍으로 김해 밀양의 아전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흥선 대원군을 지지한 사람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정권다툼을 했는데  결국 1973년 흥선대원군은 실각을 했고 명성황후의 집안 민 씨 일가의 보복으로 그녀의 아버지 배지홍은 역모죄로 처형을 당하고 그녀의 집안 식구들은 노비가 되었습니다. 
어머니 이 충격으로 실명을 해버렸습니다.
10살 때 밀양으로 관기로 팔려가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도망을 나와 절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녀가 도망친 관기라는 소문이 나  관할에 잡혀와 다시 관기가 되었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지인인 정병하를 만나게 됩니다. 정병하는 그녀를 관기에서 빼주고서는 일본으로 건너가기를 권합니다.  배정자는  정병하의 조언으로 일본으로 가 유학 중인 안경수를 만납니다.
배정자는 당시 일본으로 도피 중인 갑신정뱬을 이르 킨 김옥균을 안경수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명성황후의 대한 적대감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김옥균은   당시 일본의 내각총리로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배정자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2,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배정자

이토 히로부미는 배정자를 양녀로 삼아 승마, 수영, 사격 변장술, 매복술등 스파이 훈련을 본격적을 받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배정자는 철저한 친일파 여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라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여인을 정말로 딸로만 대했는지는 개인적인 의문이 생깁니다.
그녀는 1895년 하야시 공사 통역관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 상류사회에 입성하게 됩니다.
조선상류 사회인물들과 꾸준히 교류를 하면서 중요한 정보들을 이코 히로부미에게  보내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엄귀비의  연줄로 고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세련된 외모와 신여성의 매력으로 배정자에게 큰 호감을 보이게 됩니다.
당시 일본과 러시아는 대한제국을 두고 갈등이 심화 대고 있었습니다.
이때 고종은 친러파와 함께 러시아 여행의 명분으로 블가디보스톡으로  망명할  계획이었는데  고종은 배정자에게 이 계획을 흘리게 되고 배정자를 통해  바로 이토 히로부미에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 후 배정자는 이토 이토히로부미가 고종에게 보내 밀서가 있는데  이 밀서의 내용은 고종을 능멸하는 내용이 담아 있었습니다. 고종은 배정자에게 불충한 밀서를 건네다는 죄로 부산  절영도로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그러나 1906년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고 그녀는 유배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다시  일본의 스파이로 복귀했습니다,  그녀는 이토 히로부미의 권력을 업고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이 했습니다,
고종이  쫓겨나는 데에 배정자는 일본에게 많은 정보를 주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3, 이토 히로부미 사망하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히로부미는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다고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죽음으로 배정자도  한풀 꺾인 줄 알았는데  조선 주둔군 헌병사령관 아카시가 그녀의 재능을 다시 이용합니다,
그녀를 스파이로 시베리아지역으로 보내어졌습니다,  마적단 두목에게 잡힌 적도 있지만 오히려 그녀는 마적단 두목과 동거를 하면서  정보를 빼내어 일본군에 넘겨주기도 합니다,
1918년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며 남만주 일대의 조선인들 움직임을 감시하면서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독립군이 배정자를  처단인물로  지정하자  다시  국내로 돌아와 독립투사를 잡는데 일조했습니다,
일본은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녀에게 토지 600여 평을 하사 받았고, 조선 총독부로 계속해서 봉급을 받아 넉넉한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배정자는 대한통의부 비밀암살단의 박희광에 의해 죽을 뻔 하자 1927년에  은퇴를 하지만 그녀의 생활은 변화지 않았습니다,

4, 욕서 받지 못하는 악행

1940년 태평양 전쟁 때 그녀의 나이 이미 70이 넘었는데   전선에서 싸우는 대일본제국의 장병들이 고생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면서 조선의 어린 여성 100여 명을 "군인의 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끌고 가 일본군 성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대한제국은 해방이 되었습니다,  이후  배정자는 야산에 숨어 살다가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발효되고 1949년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바로 체포되어지만 아쉽게도
반민특위가 정치적인 이유로   해산이 되어 배정자는 풀려나버립니다.
그녀는 82세 나이에 6,25 전쟁 중에 사망하였습니다,
당시사람들은  그녀를 요망한 꽃이라는 뜻으로 "요화"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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