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은 병자호란으로 아버지 인조와 조선의 백성들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눈으로 보고 피부 직접 느꼈던 왕입니다.
그는 왕이 되어 왜 그렇게 북벌에 진심이어야 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1. 청나라에서 형 소현세자의 사망 소식을 듣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로 태어나 세자로 책봉되기전에는 봉림대군이라고 불리웠습니다. 그 위에 소현세자가 있어서 젊은 나이에 자신이 왕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기 힘들어 것입니다.
거기에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인질로 잡혀서 같이 8년동안 청나라에서 살았습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켜서 더 이상 이들 형제와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둘 필요가 없으므로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명을 내립니다. 일단 소현세자가 먼저 조선으로 떠났습니다. 그 후 몇 달 뒤 봉림대군도 조선으로 출발하려고 할 때 조선에서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소현세자가 조선에 도착한 지 두 달 만에 학질로 사망하였다는 것입니다.
형의 사망 소식도 충격이었지만 아버지 인조가 독살 했다는 소문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인질로 있으면서 청나라의 사람들과 어느정도의 친분도 쌓았고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문물에도 큰 관심이 많았습니다. 또한 청나라의 왕실과 신하들은 소현세자에게 우호적인 편이어서 조선에 관한 일들을 소현세자를 통해 해결하려는 했습니다. 이를 지켜본 인조는 어쩜 청나라가 자기를 내쫓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앉힐 수 있다는 위안감까지 느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인조는 물론이 전체적인 사회적 분위기는 청나라는 조선을 직발고 명나라를 멸망시킨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소현세자가 청나라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니 인조와 신하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봉림대군(효종)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2. 세자로 책봉되다.
인조는 봉림대군(효종)이 조선으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서 세자로 책봉을 하였습니다. 봉림대군(효종)은 엄청 당황스러워했습니다. 장자승계를 원칙으로 하는 조선이 봉림대군은 둘째인데 세자로 책봉을 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법대로 하자면 소현세자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갑자기 자기를 세자로 책봉을 하니 당황스러워하였습니다. 인조 왈 자신이 병이 심상치 않는데 세손은 아직 나이가 어려 어쩔 수 없이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왕이 어리면 왕의 어머니가 성인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면 되는 것 있었습니다. 아마 인조는 며느리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싫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뒤 1년이 좀 지나서 소현세자 부인 강 씨를 감금을 시키고 인조는 자신의 먹는 전복죽에 강 씨가 독을 넣었다며 아무런 조사도 없이 사형시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 아들 셋을 제주도에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그리고 2년 뒤 사망을 하였습니다.
인조는 효종의 왕의 자리를 위험요소가 되는 소현세자의 가족을 비롯해 주변인물들을 제거했습니다.
3,17대 왕이 되다.
효종은 아버지 인조가 형 소현세자를 죽였을지도 모르다는 의심을 조금은 했나봅니다. 효종이 세자시절 감기로 인해 오열이 났는데 아버지 인조가 이 소식을 듣고 의관 이익형을 보내었습니다. 효종은 이익형의 진료를 받지 않기 위해 감기가 다 나았다면 진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바로 소현세자가 이익형의 침을 맞고 사망하였습니다.
아무런 증거는 없지만 효종은 아마 의심을 하였던것 같습니다.
효종은 왕으로 등극하자 김자점같은 청나라의 우호적인 친청세력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싫어하는 반청론자인 송시열과 김상헌을 조정에 불러들였습니다. 송시열은 벼슬은 없으나 그를 따르는 성리학 인재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송시열과 함께 북벌정책을 본격적으로 합니다.
이를 지켜본 김자점은인조의 후궁 귀빈 조씨의 아들을 왕으로 올리기 위해 그의 아들과 같이 역모를 꾀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 사형을 당합니다.
그 이후 이완, 유혁연, 원두표등의 무장을 중용하여 북벌의 위한 본격적인 군비 확충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효종은 북벌의 선봉 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 임금의 호위를 맡은 금군을 기병화하는 동시에 모든 금군을 내삼청에 통합하고 군사도 6백여 명에서 1천여 명으로 증강시켜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수어청을 재 강화하여 한성 외곽을 보강하였습니다. 또한 중앙군,어영군, 훈련도감등을 증가하려고 했지만 비약한 재정으로 실현을 하지 못했습니다.
효종은 청나라를 공격하기위해 군사력을 키웠는데 오히려 그들을 위해 나선으로 지원을 2번이나 보내었습니다. 나선은 지금의 러시아로 청나라와 한참 대결 중이었는데 청나라가 효종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보내어졌습니다.
이런 사건을 보면 과연 효종은 북벌정책이 진심이었을까 하는 의심을 갖게 합니다.
먼저 효종은 누구보다 청나라의 군사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인질로 있을 때 소현세자 대신 청나라 군사들과 같이 전투를 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모멸감도 느껴겠지만~ 그런 이유로 북벌정책을 만들었다기에는 너무 개인적인 감정이어서
아마도 북벌정책은 진짜 청나라에게 공격하려고 군사력을 키운 것보다는 다시는 조선을 지키려는 방어적인 의미와 군사를 키움으로써 왕권 강화를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을까요~
4. 갑작스러운 죽음
효종은 민생들을 위해 김육의 청으로 대동법을 충청도와 전라도로 확장하여 실현했습니다. 그리고 태음력과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하여 24 절기의 시가과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시현력을 사용하게 했습니다, "농가집성"드의 농서를 마련하여 농업의 생산을 늘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효종은 북벌정책뿐 아니라 백성의 삶에도 어느 정도는 신경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이 재위기간은 10년뿐이 안되었습니다. 얼굴의 종기가 심하게 퍼져서 치료하는 과정에 과다 출혈로 사망을 하였습니다.
효종도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많은 의문설이 떠돌았습니다.
효종이 정치를 잘했다는 평판은 나오지는 않지만 세자 책봉 이후 좋아하는 술을 끊고 공부에만 집중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2번의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의 왕으로서 나름 최선을 다 할려고는 했던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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